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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미지와 실체 - cimio(09.03.26)

yygg 2009. 5. 22. 20:05

출처: http://cimio.net/584

 

 

이미지와 실체

 

- cimio(09.03.26)

 

 

어떤 남자가 처음 만난 여자와 술을 마시가 정신을 잃은 후, 깨어보니 목욕탕 욕조 속이고 신장이 없어진 상태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미국에서 자동차를 몰다가 앞차에게 빨리 가라고 전조등으로 신호를 보냈다간 앞차에 탄 갱단이 당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이야기는 어떨까요? 이러한 이야기들은 도시의 전설 (urban legends)라고 불리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이러한 이야기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가 없고, 잊을 수 없기에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어 결국 사회 전체로 퍼지기 마련이죠. 심지어 "할로윈에 아이들에게 독이 든 사탕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지만, 몇몇 주에서는 이러한 루머 때문에 아이들에게 독이 든 사탕을 나누어주면 가중처벌하는 법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때 배운 교과서 내용은 거의 잊었는데, 어디서 줏어 들은 남의 나라 이야기는 몇십년이 지나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만약에 내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이렇게 오래 기억될 수 있다면 좋겠죠.

이처럼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메시지의 특성에 끈끈함 (stickiness)라는 명칭을 붙인 사람은 The Tipping Point를 쓴 말콤 글래드웰이었죠. 그는 자살에서 지하철에서 발생하는 범죄까지 특정한 행동이 갑자기 사회에 퍼지는 현상을 놓고 연구한 결과, 소수의 영향력 있는 사람, 끈적한 메시지, 그리고 적절한 상황이라는 세 박자가 맞는다면 하나의 현상이 사회 전체로 순식간에 확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찌보면 뻔한 말이라 그리 중요하지 않긴 하지만, 책 자체가 워낙 재미있기 때문에 대단한 인기를 끌었죠. Chip Heath와 Dan Heath는 이를 발전시켜 "메시지를 끈적하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하는 주제로 책을 썼는데, 제가 요즘 읽는 책이 바로 이들이 쓴 Made to Stick 입니다. 위에 나온 예들도 대부분 이 책에서 인용하였죠.

기억에 남는 메시지가 중요한 분야 중 하나는 바로 정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후보의 정책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관심이 없고,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에 따라 투표할 후보를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대통령 후보가 옷에 미국 국기 뱃지를 달았는지 여부에 따라 투표를 결정한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상황이니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정책을 잘 세우는 능력 보다, 간결한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능력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존 F. 케네디는 대중을 상대로 기억에 남는 메시지를 전하는데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했던,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 물으라"는 말은 지금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메시지입니다. 그가 국회연설에서 했던 "60년대가 끝나기 전,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말은 우주경쟁에서 뒤처져 패배감에 사로잡혔던 미국인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실제로 미국은 1969년 달에 인간을 보내게 됩니다.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여 위기가 찾아오자, 그는 베를린으로 날아가 "모든 자유인은 베를린 시민이다. 나도 자유인이기에 자랑스럽게 말한다. Ich bin ein Berliner"라는 유명한 연설로 베를린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베를린을 구해냅니다. 그가 대통령직을 얼마나 잘 수행했냐에 대해선 의견이 다양하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는 메시지를 잘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물론 "그의 연설은 그가 작성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작성했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차피 미국 대통령은 모두 남이 써 준 원고를 읽습니다. 그런데 케네디와 동시대를 살았던 닉슨 대통령의 말 중 기억에 남는 말은 "I am not a crook"(나는 범죄자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이 말을 했다가 범죄자라는 인상이 남았죠)이고, 존슨 대통령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았는데, 케네디 대통령이 한 말은 여러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는 사실은 케네디 자신이 뛰어난 communicator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정치인이 만들어내는 메시지는 때로는 현실과 전혀 상관이 없는 거짓말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말도 때로는 매우 성공적으로 사람들에게 퍼집니다. 예를 들어 노태우씨는 5공화국의 핵심인물이었지만,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열겠다"는 구호로 민심을 사로잡아 대통령에 당선이 됩니다. 5공화국 정부에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던 사람들이, 다시 5공화국 후보가 나왔는데도 찍어주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죠.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로도 직접 서류가방을 들고 가는 등 대단히 성공적으로 "쇼"를 함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능이 드러나면서 민심은 멀어져갔고, 결국 임기말이 되어선 완전히 무시 당하는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보통사람"이라는 말에 속았던 국민으로선 후회해도 소용 없는 일이었죠.

이와 비슷한 일이 2007년말에도 벌어집니다. 당내 입지가 약했던 이명박 후보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로 경선에서 승리했고, 대통령 선거까지 쉽게 이깁니다. 하지만 막상 대통령이 된 후로, 그가 보여준 모습은 경제를 잘 알고, 경제를 살릴 능력이 있는 "경제 대통령"과는 거리가 멀었죠. 즉, 이명박=경제 대통령은 분명히 끈적한 메시지이긴 했지만, 실체는 없는 허상이었다는 말입니다.

다음 선거에서 군인 출신 후보가 "결단력 있는 대통령"이미지를 들고 나오거나, 경제 학자 출신 후보가 "경제를 잘 아는 대통령" 이미지를 들고 나오면 국민들은 또 사실 검증은 건너뛰고 이미지에 근거해 투표하겠죠. 그러고 보면 끈적한 메시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끈적하면서도 사실과 다른 메시지를 구분해 내는 능력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 선거도 "뽑아놓고 후회하는" 패턴이 나타날까봐 두렵네요

 

 

출처 : 경제, 경제현실, 그리고 경제학
글쓴이 : 시나브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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