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미도
인생과 번역은 장미꽃밭에서 춤추는 것입니다
글_김선경·사진_김상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어둠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지고, 이어 ‘번역 이미도’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불과 1초다. 그러나 영화의 담백한 여운과 함께 머리에 남는 세 글자, 이미도.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일까’ 오랫동안 궁금한 이름이다.
외국영화 번역가 이미도(47세). 그가 번역한 영화는 <글래디에이터> <뷰티풀 마인드> <니모를 찾아서> <반지의 제왕> 등 450여 편에 이른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의 80% 이상이 그의 손을 거쳤다. ‘이미도가 번역한 영화는 흥행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좋은(흥행한 영화가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영화만 고른 것은 아니다. 우연한 행운은 더욱 아니다. 오롯이 외화 번역에만 매달린 지 14년, 영화의 맛을 잘 살리면서도 우리말이 매끄럽게 잘 어우러지는 번역으로 알려지면서 대작 영화일수록 그에게 의뢰하는 까닭이다.
“나는 영화라는 병풍 뒤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주목받을 이유가 없지요. 내 이름을 자막에 올린 것은 스스로 정신 바짝 차리기 위한 장치예요. 좋은 번역을 위한 채찍이지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에 올라가는 내 이름을 보면 얼굴이 확 뜨거워집니다.”
영화가 끝날 때 번역자의 이름을 넣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영화 번역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다. 모국어도 소통의 문제가 생기는데 하물며 이방인이 옮기는 외국어임에랴. 100% 완벽한 번역은 없다고 믿는 그는, 영화 한 편에 보통 예닐곱 번 고치고 또 고친다. 언어적 실력뿐만 아니라 영화의 배경과 역사, 문화적 코드, 하물며 그 사회에 떠도는 농담까지 꿰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영화 <시카고>에 흐르는 <올 댓 재즈All That Jazz>의 ‘럭 린디Luck Lindy’라는 표현은 ‘행운의 린디’가 아니라 역사상 처음으로 대서양 단독 무착륙 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의 애칭이죠. 노래 가사여서 살짝 지나가도 무리는 없었지만, 뭔가 어색해서 전전긍긍하다가 영화 상영 직전에 미국에 전화를 걸어 정확한 표현을 알아냈죠.”
번역의 괴로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영어를, 뜻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스크린에 딱 맞게 우리말로 옮기는 것. 딱 한 글자 없애느라 피가 마른다. 또 원어민들이 웃는 장면에서는 우리 관객도 웃어야 한다는 자신만의 원칙 아래, 우리 식의 유머를 찾느라 생각을 이리저리 뒤집고 비튼다. 영화 <슈렉 2>에서 ‘far far away king- dom’을 ‘겁나 먼 왕국’으로 옮긴 것도 그중 하나다. ‘far far away’는 <스타워즈> 첫 장면에 장중하게 흐르는 내레이션 ‘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아주 먼 옛날 은하계 저편에)를 패러디한 것인데, 그는 아주 간단하게 ‘겁나 먼 왕국’으로 옮겨 ‘풋’, 하고 웃음이 터지게 했다.
“번역이란 행위는 장미꽃밭에서 춤추는 것입니다. 아름다워 보이지만 발밑에 가시가 있지요.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번역은 자기와의 싸움이 절대적입니다.”
영화와 영어, 그의 삶의 두 가지 집합은 아버지에게서 비롯한다. 미군 부대 통역병이었던 아버지는 ‘R’과 ‘L’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며 혼쭐을 낼 만큼 엄하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극장에 다녔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강영흘의 영문소설 《초당Grass Roof》을 선물했다. 책에는 수없이 많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 밑에 영어로 된 뜻풀이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농고를 중퇴하고 독학으로 영어를 깨우친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깨알 같은 글씨를 보면서 그는 세상에는 무엇이든 쉬운 일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그 책을 읽으면서 그는 세계를 여행하며 그곳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번역해 보고 싶은 꿈을 꾸었다.
막연히 누군가와의 ‘소통’을 꿈꾸며 언어를 공부하던 (대학에서 스웨덴어 전공, 미국에서 커뮤니케이션학 전공) 어느 날, 마음속에서 잠자던 영화와 영어가 홀연히 그를 외화 번역의 길 위로 불러냈다. 선배 일을 돕다가 우연히 영화 <블루>를 번역하게 된 것이다. 살다 보면 자신의 길을 운명처럼 받들게 되는 때가 있는데, 그도 그랬다.
“번역자로서 가장 먼저 영화를 보는 기쁨도 크지만 나를 통해 영화의 의미가 더하고, 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문장 하나하나 깊이 있게 빠져듭니다. 그러다 보면 제일 먼저 제 가슴이 감동으로 물들게 되지요.”
영화 속에 숨은 인생의 비밀들을 차곡차곡 모아 둔 그는, 영화에 흐르는 아름다운 명대사들을 징검다리 삼아 사람들마다 주어진 인생을 잘 넘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펴냈다. 《영화백개사전 영화백과사전》에는 ‘오늘은 당신의 남은 생의 첫날입니다(<아메리칸 뷰티>)’‘신은 문을 닫으실 때 어딘가에 창문을 열어 주신다(<사운드 오브 뮤직>)’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게 해요(<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등 그가 뽑은 보석같은 명대사로 가득하다. 영화와 사람을 잇는 ‘다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그렇게 조금씩 넓혀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언젠가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오리라. 미도美道, ‘아름다운 길을 걸으라’며 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만큼만, 영화를 매개로 사람과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그는 다짐한다.
기사를 마무리할 무렵, 늦은 시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기자님! 영화가 뭐냐고 물어보셨죠. 그때 제 대답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영화는 ‘꿈틀’이에요. 불가능하다고 여긴 꿈을 영화를 통해 현실 속에 꿈틀꿈틀 움직이게 하는, 영화는 ‘꿈의 틀’이라는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