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글리세린을 약간 살 수도 있다. 그것을 여배우의 눈에 몇 방울 떨어뜨리면 그녀는 울 것이다. 나는 몇 번인가 애써
진짜 눈물을 가까스로 찍은 적이 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다. 진짜 눈물은 두렵다. 사실 내게 그
눈물을 찍을 권리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겠다." - 키에슬롭스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Fahrenheit
9/11)>은 키에슬롭스키의 정반대 쪽으로부터 출발한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시작한 키에슬롭스키가 극영화로 넘어가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지극히 윤리적인 판단에 의한다. 타인들의 내밀함에 익명으로 침투하는, 즉 ‘침범’이라는 용서할 수 없는 행위와 연루되어 있다. 이 침범은
키에슬롭스키에게 있어 마치 판사가 내밀함의 경계를 침해하는 전횡적 다큐멘터리들을 만들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는 구약에서의 이미지들의
금지, 타락시키는 시각성으로부터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영화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키에슬롭스키의 불신은, 기껏해야 다큐멘터리
속의 쇼트들은 이 현실이 무척 깨지기 쉬운 것임을, 우연한 결과들의 하나임을, 거기에는 영원히 그 그림자 같은 분신들이 따라붙어 다니고 있음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 무어는 키에슬롭스키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진짜 슬픔의 공포’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댄다. 마이클 무어의 원래 의도가 조지 부시의 대통령 재선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고, 實名 배우로 출연하는 조지 부시를 미국
영화사상 가장 무능하고 우스꽝스럽고 비열한 캐릭터로 재현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영화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진짜 슬픔의
공포’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영화는 외견상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 문법을 고스란히 따라가면서도 공포영화에
코미디 속성을 가미시킨 스플래터(Splatter) 무비에 속한 것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이 블랙 코미디의 주연은 조지 부시인데, 빈 라덴 일가의
텍사스 재정 매니저인 제임스 R 베스, 사우디 정부의 수석 변호사로 고용된 제임스 베이커, 법무부 장관인 존 애시크로프트, 국방부 부장관인 폴
올포위츠 등의 뛰어난 조연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조연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코미디언들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정작
자신들은 모르고 있다는 듯이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라크에 아들을 군인으로 보냈다가 사망 통지서를 받은 어머니의 절망에
찬 얼굴, 감독의 고향 ‘플린트’에서 신병 모집관의 구인 작업에 몰려드는 흑인과 히스패닉 같은 마이너리티들의 넋빠진 표정,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자식을 잃고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이라크 여성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우리는 섬뜩하고 처절한 그늘을 발견한다. 이 영화는 초강력, 울트라 공포
영화이다.
2.
"9/11 사건은 부시 행정부에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만큼 분명하게 미국의 세계
전략을 천명할 기회를 주었던 계기가 된다." (페리 앤더슨, <강압과 동의>, 64)
마이클 무어는 이 ‘계기’의
기원을 찾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동분서주한다. 영화 <화씨 911>은 부시 父子와 빈 라덴 일가와의 오래되고 친밀한 관계를 축으로
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부시 행정부의 행보를 따라가며, 이라크 침공을 결정한 부시의 더러운 배경을 들춰낸다. 감독에 의하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세계 전략의 일환이라기보다 부시 父子의 재정적 이윤 창출을 위한 비즈니스에 불과하다.
영화는 9/11 사건 직후, 미국
전역의 비행장에 이륙 금지 조치가 취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 라덴 일가를 태운 비행기만이 유유하게 미국 땅을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다.
그리고 이라크 침공 이후 빈 라덴이 숨어 있다고 추정되는 지역을 미군이 두 달 동안 접근하지 않았던 이유를 캐묻는다. 이 영화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 장면, 두 대의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을 들이박던 그 시점, 플로리다의 한 초등학교에서 ꡔ내 친구 염소ꡕ라는 동화책을 아이들과 읽고 있던
부시에게 보좌관이 황급하게 들어와 귓속에 비밀 보고를 전하자 무려 7분 동안 멍청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장면에서 우리는 쓴웃음과 허탈한
한숨만이 새어나온다.
국가의 비상 사태에 대해 결단력을 내릴 판단력조차 없는 대통령, 당선된 뒤 첫 8개월의 42%를 휴가로 써먹은
무능한 대통령, 알 카에다 조직과 연계도 맺지 않았고 대량살상무기도 갖고 있지 않았던 이라크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운 파렴치한 대통령.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조지 부시에 대한 마이클 무어의 집요한 정치 공세이다. 마이클 무어는 미국 역사상 가장 멍청한 대통령이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선무당과 같은 부시의 작태에 미국의 정치가들과 FBI, 그리고 軍産 복합체가 깊숙이 개입해 있음을 밝히고
있다.
3.
헤겔의 이른바 ‘理性의 奸智’로 작동하고 있는 부시의 세계 철학. 세계 평화를 위해 ‘악의 축’을
척결하겠다고 전쟁을 일으킨 초강대국 미국의 선택은 너무 끔찍한 블랙코미디이다. 부시는 편집증 걸린 독수리 오 형제이다. “은빛 날개를 펼쳐라,
독수리 오 형제 뚜뚜뚜. 세계를 넘보는 검은 무리 사라져라. 평화를 사랑하는 지구 방위대 불새 되어 지키리.” 그러나 부시가 외쳐대는 ‘세계를
넘보는 검은 무리’란 기실 부시 일가의 석유 산업에 장애가 되는 어떤 요인에 불과하다. 9/11 사태 이후 패닉(panic) 현상에 빠진 미국
국민은 아랍권에 대해 극한의 공포와 증오를 지니게 되고, 이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나 빈 라덴 일가와의 밀월 관계가 끝장날 수 있는 상황, 바로
이 상황이 부시에게는 진짜 ‘검은 무리’의 정체였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시가 뱉어내는 말들은 무책임하게 날아다닌다. 그 말은 속이 텅 텅
비어 있는 기표이다.
어떤 개념에 대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면서도 “이것이 그것, 진실한 것, 진실한
의미”라고 열렬히 느낄 때 우리는 바로 “男根의 의미”와 마주친다. 가령 정치적 담론에서 “민족”이라는 주인 기표는 의미의 불가능한 충만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텅 빈 기표다. (슬라보예 지젝, <진짜 눈물의 공포>, 107)
잦은 콜라주(collage)와
몽타주(montage)로 수식한 <화씨 911>은 현대 미국 정치사에 대한 마이클 무어의 현장 보고서이다. 감독은 기록 화면과 직접
취재한 르포를 치밀하게 풀칠하여 부시와 부시 행정부의 위선적이고 야만적인 내면 세계를 드러낸다. 마이클 무어가 연출한 이 사이코드라마의 출연진
목록에 비록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 헝가리, 일본, 한국과 같은 스턴트맨들도 기억해 주어야 마땅한 대접이
되리라.
영화의 전반부는 부시 父子와 빈 라덴 일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중반 이후부터는 이라크에 참전한 병사들, 아들을
이라크에 보낸 뒤 전사 통보를 받는 어머니, 미군의 폭격으로 가족과 집을 잃은 이라크인, 이라크전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군수업체 관계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어지럽게 몽타주된다. 戰意를 높이기 위해 군인들이 노래 “The Roof is fire, We don't
need no water let the mother fuckers burn, burn mother fucker burn.”을 부르는 동안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불타는 건물과 시신들이 겹쳐진다. 미군 기지에서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폭격으로 친척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Where
are you, God?”을 외치는 이라크 여인의 절규와 난해한 불협화음을 만든다.
이라크전에 참가했다 귀국한 병사는 이라크 출전
명령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감독의 질문에 단호하게 거부하겠다고 답변한다. 보수적인 민주당원이자 애국주의자를 자처했던 한 미국 여인은
그의 아들을 이라크에서 잃은 뒤 백악관 앞에서 고통스럽게 오열을 터뜨린다. 이라크전을 수행하고 있는 한 미국 병사는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자기 마음 한 부분을 죽이지 않고는 남을 죽일 수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마음 한 구석부터 파괴되고 있음을 감내해야만 한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은 허무는 자와 허물어지는 자에 대한, 우리 시대의 부끄러운 비망록이다.
"결코 나는
미국인, 특히 부시와 럼즈펠드 미군의 만행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미국인에 대한 인상은 좋은 편이었는데, 여기 와서 다
허물어졌다." - 김선일의 메일 편지 중에서.(204.5.15. 토요일 오후 10:55)
"우리는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를 때
두렵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 하거나 다치게 하거나 미래를 훔치려 할 때 화가 납니다. 내일도 엄마와 아빠가 살아 있기만을 바랄 때
우리는 슬퍼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를 때 혼란스럽습니다." - 이라크 소녀의 연설 <당신들은 내
모습을 떠올려야 합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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