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기타

김수환 추기경을 통해 생각해 보는 정의의 실천

yygg 2009. 2. 19. 00:25

나는 김수환 추기경이 어떠한 사람인지 깊숙이는 모른다.

사람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민주화 운동에 이바지한 분이라고 하니까

그런 분인 줄로만 알았고, 깊게 존경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천주교에 의지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잘 안다.

(물론 정치인도 있고, 개신교도 있고, 순수 시민 단체도 있고, 대학생들도 있었다.)

민주를 표방하는 시위의 종착점은 명동성당이 많았다.

한나라당 후보가 서울 시청에 가서 으리으리하게 판을 벌리면,

민주당 후보는 긴 길을 돌고 돌아 명동성당으로 귀착한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국가 인권위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명동성당 언덕 아래로 온다.

 

그러나 요즘은 가톨릭이 확실히 달라졌음을 느낀다.

명동성당 구내에 천막을 치고 농성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대개 나가라는 요청을 받는다고 한다.

성당 구내는 성당의 영역이니 그쪽 분들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나,

분명 예전같지 않음을 느낀다.

정진석 추기경님이라는 분도 일절 사회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 듯하다.

김수환 추기경이 염려를 했던 권력의 불의, 가난한 자들의 고통이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말인가?

가톨릭 신자 500만명을 바라보는 지금,

500만명을 만들었던 그 저력은 발휘되고 있지 않는 듯하다.

삼성 비자금 사건에서 김용철 변호사를 보호했던

정의구현사제단 김인국 신부님은

지금 어디론가 한직으로 가 계시다고 하니...

가톨릭은 가톨릭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나,

분명히 이십여 년과 달라진 것이다.

 

그럼, 무엇이 김수환 추기경을 유명인으로 만들었던가?

아까 KBS에서 김수환 추기경 다큐를 방영했는데,

프로그램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일생을 잘 정리한 프로그램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자,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고 한다.

그러니 천주교 신자들은 당연히 그를 존중할 것이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이 범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은 것은,

그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1978년인가 인천 동일방직 여공들이 노동 조건 개선을 들고 일어났을 때,

평소 노동자들을 산업인력이라고 치켜세우던 당국에서는

그 여공들을 빨갱이라고 매도하고 사람 똥을 뿌리면서 탄압했다고 한다.

여공들이 명동성당으로 찾아왔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였다.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준 것이다.

힘들지 않으냐고,

여러분들 힘든 것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고.

여공들이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박해받아 본 자들은 알 것이다.

고립되어 본 자들은 알 것이다.

정당한 것을 인정받지 못하고,

간절한 소원을 거부당할 때,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로 위로를 받으면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를.

그리고 동일방직 여공들을 주제로 강론을 하였다.

"악의에 찬 허위로 여공들을 매도하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 목소리는 격렬하지도 않았고 지극히 온당한 말들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79년 1월엔가 피정(휴식과 기도의 기간이라고 한다.)을

한 달 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긴 고민을 일기에 기록하였다고 한다.

무엇을 고민했을까?

종교가 정치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가톨릭 내부의 압력을

모른 체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이는 정치 권력으로부터 가톨릭을 지켜내기 위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가톨릭은 일제 시대에 일본 식민 당국의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아픈 과거도 있다.

그런 고민의 기간 동안에 그가 내린 결론은

교회는 교회만의 교회가 아니요, 세상 속의 교회라는 것,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광주민주화운동 때도 마땅히 하여야 할 말을 하였다.

그는 광주에 직접 내려가서 관료와 군인들을 만나고 신도와 시민들도 만났다.

그는 신도들과 시민들이 전하는 말을 들었고, 그들을 위로하였다.

광주의 시민들은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는 광주 시민들에게서 진실을 발견하였고, 그들의 편에 서기로 하였다.

1980년 같은 해 7월 그는 이런 메시지를 강론하였다.

"참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위험에 빠질 각오를 하여야 합니다.

체념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권력과 금력을 추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괴롭게 할 수 있을 것임을 잘 압니다."

전두환 정권이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민주주의의 목을 조르고 있을 때,

광주는 그 폭압에 굴하지 않고, 피로 맞선 곳이었다.

언론은 침묵했고, 내막을 모르는 이 땅의 모든 곳에서는

광주의 시민들을 거친 난동꾼 정도로 폄하하였다.

광주가 가장 고독할 때,

김수환 추기경은 그들의 편에 섰고,

아무도 무서워 말하지 못할 때,

그는 진실을 말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이 삼십여 년간(1968~1998) 재직했던 대주교 자리에서 물러난 후,

무슨 활동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사립학교법 문제에 관해서 가톨릭 교육 재단의 편에 섰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사람이 아주 변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변했을까? 모른다.

변하였어도 좋다.

우리들 대부분은 다른 이를 대신해 손해를 보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여 살려 하면서도,

"김수환 당신은 죽을 때까지 똑바로 살아야 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똑바로 살라는 것이 힘들게 살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젊은 날,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 시절만으로도 할 만큼 했다.

그가 보여준 것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시사를 얻을 수 있다.

 

약한 자의 편에 서라는 것,

핍박받는 자의 편에 서라는 것,

바른 말을 하라는 것,

권력과 금력을 쫓아 양심을 내팽개치지 말라는 것이다.

'정의'이다.

'정의'는 못난 사람에 대한 동정이 아니다.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갖지 못하는 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정의'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도 추구할 수 있는 덕목이다.

그는 그가 생각하는 것을 입밖으로 말한 것밖에 없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없을까?

 

어둠의 시대다.

'정의'를 말하는 것이 여전히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는 시대이다.

'정의'를 '좌익'이나 '빨갱이'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젊은 시절, 그는 당연한 것을 말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지극히 당연한 말들을 온화하고 길게 이야기했다.(이것이 그의 방법론이다.)

그리고 말하는 것은 실현하게 하는 것이었다.

진실의 공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위태위태하다는 점에서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정의를 말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게 너무도 어려운 이 시절,

힘이 지배하고, 소유가 지배하고, 돈에 매혹되고, 감각에 미혹되는 이 시절,

김수환 추기경이 이 사회에 보여준 삶은 '정의'가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