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속성
- cimio(09.07.24)
요즘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이 쓴 서양 문학의 정경(The Western Canon)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서양의 문학사에서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권위 있는 작품들을 선정하고 이에 대한 해설을 곁들여서 서양 문학사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줍니다(그런데 일반이 대상이 아닌, 문학 전공자를 대상으로 해서인지 내용이 몹시 어렵군요). 이 책에서 블룸이 서양 문학의 최고봉이자 가장 영향력이 큰 작품으로 꼽는 것은 바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입니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서양 문학의 흐름을 결정했고, 그 후에 온 작가들이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으며 그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서양 문학이 성립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세속의 성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하도 셰익스피어 찬양을 읽다 보니 저도 셰익스피어를 접해보면 좋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글로 읽으면 오늘날의 영어와는 매우 다른 언어 때문에 이해가 어렵고, 대부분이 연극의 대본이기 때문에 그냥 읽어서는 아무래도 흥이 안 납니다. 그래서 전부터 눈 여겨두었던 BBC Shakespeare Collection을 사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한국에선 Yes24에서 판매하더군요), 유튜브에 이미 작품 대부분이 올라와 있더군요. 그래서 천천히 한 작품씩 보고 있습니다.
요즘 보는 작품은 리어왕입니다. 아시겠지만 리어왕은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좋은 말을 하는 딸들에게 영토를 배분해준 리어왕이 딸들의 버림을 받고 미쳐가는 비극을 그린 작품입니다. 극 중 리어왕은 "내가 남에게 죄를 지은 것보다 남이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이 더 많다."("I am a man more sinned against than sinning.")라고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이 장면에서 셰익스피어는 관객들에게 "정말 리어왕은 억울하게 해를 입은 사람인가? 리어왕의 잘못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지요. 과연 리어왕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리어왕의 가장 큰 잘못은 권력을 포기하면서 권력의 특권을 누리기 원한 것입니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 왕의 책임을 벗어 버리고 인생을 즐기기 원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죽은 후 국가를 유산으로 남기는 대신 살아 있을 때 딸들에게 영토를 배분합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넘겨주면서도 권력의 특권은 누리기 원했습니다. 이는 그가 백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기 원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나죠. 그는 '권력을 넘겨주고 나서도 권력의 특권을 누리려면, 나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넘겨줘야겠다.'고 판단합니다. 그가 영토를 배분하기 전, 딸들에게 "나를 향한 사랑을 표현해 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딸들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신이 권력의 특권을 누리도록 도와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일단 영토를 배분받은 딸들은 그의 특권을 박탈하고, 그를 박대합니다. 권력은 넘겨줘도 권력의 특권은 누리겠다는 그의 계획은 차질을 빚고, 그가 의지할 대상은 그에게 사랑을 표현하기를 거부했던 딸 코델리아 밖에 남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보여주는 권력의 속성은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자는 언젠가 "이 권력을 계속 잡을 것인가, 아니면 넘겨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권력을 계속 잡았다간 국민의 반발 때문에 권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고(이승만 대통령처럼), 아니면 조직 내부의 불만이 터져 나오면서 권력을 상실할지도 모릅니다(박정희 대통령처럼). 따라서 많은 권력자는 후계자를 정해서 그에게 권력을 넘겨줍니다. 이때 권력자가 후계자를 선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자신에 대한 충성도이지요. 만약 후계자가 권력을 넘겨 받고 나서 자신을 배반한다면 자신은 감옥에 가거나 처형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권력자는 보통 자신과 절친한 사람에게 권력을 넘겨줍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절친한 친구 노태우 씨를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 매우 좋은 예죠. 하지만, 후계자가 일단 권력을 잡게 되면, 전임자에 대한 충성심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됩니다. 우선 자신의 권력이 막강하기에 전임자를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으로 보기가 힘들 뿐 아니라, 자신이 인기를 끌려면 전임자를 비난하거나 처벌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청문회에 나와 곤욕도 치러야 했고, 백담사에 유배도 가야 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도 김영삼 씨가 자신을 보호해 주리라고 어느 정도 기대했지만, 결국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친구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같은 당 이회창 후보를 어느 정도 밀어줬는데, 나중엔 이회창 후보가 자신을 보호해 줄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와 거리를 둡니다. 결국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서 패하고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이 슬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전임자 김영삼 대통령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대표적인 예가 1997년 외환위기), 그를 전혀 처벌하려고 들지 않았죠. 그에 비해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이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전임자를 야멸차게 몰아쳤습니다. 그러고 보면 권력을 내준 사람의 말년이 어떻게 될지는 후임자의 자발적인 태도가 결정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힘없는 아기로 태어나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힘없는 아이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노년에 이르면 다시 자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인간은 이러한 자연적인 흐름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그 순간 권력을 쥔 사람의 마음에 달린 일입니다. 아무리 내가 잘해준 사람이라도 나중에 나를 배신할지 모르고, 내가 잘 해주지 않은 사람이라도 나를 보호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이것이 인생의 흐름 앞에서 연약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죠.
그렇게 볼 때 셰익스피어가 그리는 인간은 권력을 잡아도 유지할 수 없고, 일단 권력을 잃고 나면 철저하게 무력해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임자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사람이 권력을 함부로 써서 전임자를 괴롭혀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무고하게 전임자를 핍박하는 사람에겐 정의의 처벌이 따르는 법이죠. 그렇기에 리어왕의 등장인물들은 끊임 없이 신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주 먼나라의 이야기인데 우리 사회에도 울림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리어왕은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이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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