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등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내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해서 전할전, 등불등자(傳燈寺)를 써서 전등사로 개명한 사찰입니다.
이절의 입구에 있는 대조루 밑을 지나들어가면 정면에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웅전 안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되어 옮겨진 법화경 목판104매가 보전되고 있다.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복원되어 있다.
강화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였다가 1660년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1678년이래 실록 및 서적을 보관하였고 그후 정족산 사고가 복원되었다.
경내에 있는 보물제393호 범종은 중국종으로 중국 하남성의 숭명사에서 북송시대(1097), 고려 숙종2년에 주조된것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머리에 음관이 없고 용머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는것을 볼수 있으며 견대와 요대사이에는 8괘가 둘려있어 특이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때는 승군 50명이 전투에 참가 하기도한 호국 불교의 사찰로 당시 조선수비대장이던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전등사 동문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찾아가는길 - 강화대교→알미골삼거리에서 좌회전 →전등사
초지대교 - 좌회전 - 초지진 - 초지삼거리(좌회전) - 84번지방도 - 전등사
2. 보문사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내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해서 전할전, 등불등자(傳燈寺)를 써서 전등사로 개명한 사찰입니다.
이절의 입구에 있는 대조루 밑을 지나들어가면 정면에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웅전 안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되어 옮겨진 법화경 목판104매가 보전되고 있다.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복원되어 있다.
강화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였다가 1660년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1678년이래 실록 및 서적을 보관하였고 그후 정족산 사고가 복원되었다.
경내에 있는 보물제393호 범종은 중국종으로 중국 하남성의 숭명사에서 북송시대(1097), 고려 숙종2년에 주조된것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머리에 음관이 없고 용머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는것을 볼수 있으며 견대와 요대사이에는 8괘가 둘려있어 특이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때는 승군 50명이 전투에 참가 하기도한 호국 불교의 사찰로 당시 조선수비대장이던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전등사 동문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찾아가는길 - 강화대교→알미골삼거리에서 좌회전 →전등사
초지대교 - 좌회전 - 초지진 - 초지삼거리(좌회전) - 84번지방도 - 전등사
2. 보문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바다를 건너 차량으로 15분간 들어가면 낙가산 서쪽바다가 굽어 보이는 곳에 보문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선덕여왕 4년(635) 회정대사가 금강산으로부터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절을 세우고 보문사라 하였습니다. 보문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서 절을 창건 후 14년이 되던 해에 고씨성을 가진 어부가 바닷가에서 불상과 나한상 22구를 그물로 낚아올려 절의 우측 석굴에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로부터 이 석굴에 기도를 하면 기적이 이루어져 많은 신도들이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절 뒤편에는 마애석불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앞에서 보이는 서해풍광 또한 일품입니다. 보문사 경내에는 300여명의 승려들이 수도했을 당시 사용하였다는 큰 맷돌과 향나무, 1975년에 주조한 범종이 있습니다.
찾아가는길 - 강화대교→알미골삼거리에서 좌회전→찬우물삼거리에서 우회전→인산삼거리
에서 우회전→외포리선착장→선편(약 10분소요)→석포리선착장→보문사
초지대교 → 선수선착장
단, 선수선착장 이용시 사전 배편시간 문의(932-3324)
보문사 관리사무소 전화 933-8271
3. 연미정
바다를 건너 차량으로 15분간 들어가면 낙가산 서쪽바다가 굽어 보이는 곳에 보문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선덕여왕 4년(635) 회정대사가 금강산으로부터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절을 세우고 보문사라 하였습니다. 보문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서 절을 창건 후 14년이 되던 해에 고씨성을 가진 어부가 바닷가에서 불상과 나한상 22구를 그물로 낚아올려 절의 우측 석굴에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로부터 이 석굴에 기도를 하면 기적이 이루어져 많은 신도들이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절 뒤편에는 마애석불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앞에서 보이는 서해풍광 또한 일품입니다. 보문사 경내에는 300여명의 승려들이 수도했을 당시 사용하였다는 큰 맷돌과 향나무, 1975년에 주조한 범종이 있습니다.
찾아가는길 - 강화대교→알미골삼거리에서 좌회전→찬우물삼거리에서 우회전→인산삼거리
에서 우회전→외포리선착장→선편(약 10분소요)→석포리선착장→보문사
초지대교 → 선수선착장
단, 선수선착장 이용시 사전 배편시간 문의(932-3324)
보문사 관리사무소 전화 933-8271
3. 연미정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
이 정자의 초창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고종이 구재(九齋)하기 위하여 학생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勉學)케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후 조선 중종 5년 (1510) 삼포왜란때 방어사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중종7년 (1512) 순변사가 되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황형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 한다.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로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燕尾亭)라 하였다 한다. 높은 석주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 20년(1744) 중건, 고종 28년(1891) 중수 등 수차에 걸쳐 보수하였다.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시 이곳에서 청국과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 한 곳이기도 하다.
- 군사시설 보호구역내에 위치함 -
찾아가는길 - 강화대교 → 고려인삼센터(강화대교 우쪽위치) → 좌회전하여 직진(약10분)
→ 검문소도착(검문소 뒤쪽 언덕에 위치)
4. 갑곶돈대
이 정자의 초창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고종이 구재(九齋)하기 위하여 학생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勉學)케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후 조선 중종 5년 (1510) 삼포왜란때 방어사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중종7년 (1512) 순변사가 되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황형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 한다.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로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燕尾亭)라 하였다 한다. 높은 석주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 20년(1744) 중건, 고종 28년(1891) 중수 등 수차에 걸쳐 보수하였다.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시 이곳에서 청국과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 한 곳이기도 하다.
- 군사시설 보호구역내에 위치함 -
찾아가는길 - 강화대교 → 고려인삼센터(강화대교 우쪽위치) → 좌회전하여 직진(약10분)
→ 검문소도착(검문소 뒤쪽 언덕에 위치)
4. 갑곶돈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20번지 일원
이 돈대는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후 조선 인조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이 돈대는 숙종 5년 (1679)에 죽조 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7일 병인양요시 프랑스 극동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산성, 문수산성등을 점령하였다. 동년 10월13일 프랑스군은 삼랑성(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해 패주 하였다. 이때 강화성 내에 있던 강화동종을 가져가려 하였으나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등을 약탈하고 조선궁전 건물은 불 질렀다.
- 갑곶돈대 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5. 마니산
이 돈대는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후 조선 인조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이 돈대는 숙종 5년 (1679)에 죽조 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7일 병인양요시 프랑스 극동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산성, 문수산성등을 점령하였다. 동년 10월13일 프랑스군은 삼랑성(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해 패주 하였다. 이때 강화성 내에 있던 강화동종을 가져가려 하였으나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등을 약탈하고 조선궁전 건물은 불 질렀다.
- 갑곶돈대 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5. 마니산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일원
마니산은 해발469.4m의 높이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어 먼곳에서 보면 그 모양이 아름답고 웅장한 명산으로 참성단은 그 중간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올라서서 보면 남쪽으로 서해의 여러섬이 보이고 맑은날에는 북쪽으로 개성의 송악산이 보입니다.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데 경주의 첨성대처럼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단군은 북한의 묘향산에서 출현하여 그후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고 다음에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산신이 되었다라고만 되어있어 마니산과 참성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으나 여지승람에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한 후 황해도에 있는 구월산에 옮겨 산신이된후에 이 마니산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1등산로(참성로, 단군로) 왕복 2시간 : 마니산 관광지 (계단있는곳,계단없는곳) → 참성단
⇒가볍게 등산 및 풍경을 즐기고자 하시는 분에게 권하고 싶은 등산로로 왕복 4.8km에 1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되고 상방리에서는 우리전통 한식음식을 맛 볼수 있다.
2등산로(참성로→함허동천,정수사) 왕복 2시간 30분 : 마니산국민관광지 →참성단 →함허동천시범야영장(정수사) ⇒마니산에서 함허동천이나 정수사로 등반을 할 수 있는데 편도 5.1km에 1시간 50분이 소요되며 함허동천야영장에 도착하면 족구,퍼팅,장기자랑, 야영등을 즐길 수 있고 정수사로 가면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회정선사가 창건한 고찰과 마주 할수 있으며 주변 경관과 법당 살문짝 꽃무늬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3등산로(참성로→선수) 왕복 4시간 :마니산관광지,함허동천(정수사) → 참성단 →선수횟집촌 ⇒이등산로는 편도 8.5km에 4시간이 소요되며 서해낙조등 강화에서만 볼 수 있는 멋진 풍경을 감상할수 있으며 선수에 도착하면 강화 해산물을 직접 계절별로 맛을 볼수 있어 더욱 좋은곳이다. 마니산 관리사무소 전화(930-7068)
6. 광성보
마니산은 해발469.4m의 높이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어 먼곳에서 보면 그 모양이 아름답고 웅장한 명산으로 참성단은 그 중간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올라서서 보면 남쪽으로 서해의 여러섬이 보이고 맑은날에는 북쪽으로 개성의 송악산이 보입니다.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데 경주의 첨성대처럼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단군은 북한의 묘향산에서 출현하여 그후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고 다음에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산신이 되었다라고만 되어있어 마니산과 참성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으나 여지승람에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한 후 황해도에 있는 구월산에 옮겨 산신이된후에 이 마니산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1등산로(참성로, 단군로) 왕복 2시간 : 마니산 관광지 (계단있는곳,계단없는곳) → 참성단
⇒가볍게 등산 및 풍경을 즐기고자 하시는 분에게 권하고 싶은 등산로로 왕복 4.8km에 1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되고 상방리에서는 우리전통 한식음식을 맛 볼수 있다.
2등산로(참성로→함허동천,정수사) 왕복 2시간 30분 : 마니산국민관광지 →참성단 →함허동천시범야영장(정수사) ⇒마니산에서 함허동천이나 정수사로 등반을 할 수 있는데 편도 5.1km에 1시간 50분이 소요되며 함허동천야영장에 도착하면 족구,퍼팅,장기자랑, 야영등을 즐길 수 있고 정수사로 가면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회정선사가 창건한 고찰과 마주 할수 있으며 주변 경관과 법당 살문짝 꽃무늬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3등산로(참성로→선수) 왕복 4시간 :마니산관광지,함허동천(정수사) → 참성단 →선수횟집촌 ⇒이등산로는 편도 8.5km에 4시간이 소요되며 서해낙조등 강화에서만 볼 수 있는 멋진 풍경을 감상할수 있으며 선수에 도착하면 강화 해산물을 직접 계절별로 맛을 볼수 있어 더욱 좋은곳이다. 마니산 관리사무소 전화(930-7068)
6. 광성보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이곳은 사적 제227호로 강화해협을 지키는 자연 지형이 험한 요새로 강화 12진보의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터이다. 광성보는 강화에 여러 진이 설치되기 시작한 1658년에 설치되었는데 1679년 돈대를 쌓을 때 화도돈·오두돈·광성돈이 함께 축조되었다.
1745년(영조 21)에 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였는데, 이를 안해루라 하였다. 그후 1679년에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로즈함대를 덕진진, 초지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중심으로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되기를 거부하여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순국하였다. 이때 어재연 장군과 휘하 전수비군은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순국하였는데, 전사한 어재연 장군과 쌍충비와 약 50여 명의 순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광성보에 있다.
7. 초지진
이곳은 사적 제227호로 강화해협을 지키는 자연 지형이 험한 요새로 강화 12진보의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터이다. 광성보는 강화에 여러 진이 설치되기 시작한 1658년에 설치되었는데 1679년 돈대를 쌓을 때 화도돈·오두돈·광성돈이 함께 축조되었다.
1745년(영조 21)에 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였는데, 이를 안해루라 하였다. 그후 1679년에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로즈함대를 덕진진, 초지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중심으로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되기를 거부하여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순국하였다. 이때 어재연 장군과 휘하 전수비군은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순국하였는데, 전사한 어재연 장군과 쌍충비와 약 50여 명의 순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광성보에 있다.
7. 초지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사적 제225호로 강화의 동남단 길상면 초지리에 위치하고 김포시 대명리와 마주 보이는 곳이다. 1656년 진이 설치되고 1679년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이 축조되어 이 진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6문의 포가 설치된 황산포대와 12문의 포가 설치된 진남포대가 있다. 진장으로 1666년에는 병마만호가 있다가 1763년에는 첨사가 있었고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에 배 3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병인·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등 근대까지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이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시아 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여 4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덕진, 광성의 제진을 공략하였다. 1875년 8월 21일 일본군함 운양호가 초지진포대와 격렬한 포격전을 벌여 싸운 병자수호조규의 시효진이다. 성축과 홀로 남은 노송에는 당시의 포탄자국이 남아 있다.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당시의 격전지인 길상면 초지진의 옛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아 사학자는 물론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초지진 관리사무소(930-7072)
8. 적석사
사적 제225호로 강화의 동남단 길상면 초지리에 위치하고 김포시 대명리와 마주 보이는 곳이다. 1656년 진이 설치되고 1679년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이 축조되어 이 진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6문의 포가 설치된 황산포대와 12문의 포가 설치된 진남포대가 있다. 진장으로 1666년에는 병마만호가 있다가 1763년에는 첨사가 있었고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에 배 3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병인·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등 근대까지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이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시아 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여 4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덕진, 광성의 제진을 공략하였다. 1875년 8월 21일 일본군함 운양호가 초지진포대와 격렬한 포격전을 벌여 싸운 병자수호조규의 시효진이다. 성축과 홀로 남은 노송에는 당시의 포탄자국이 남아 있다.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당시의 격전지인 길상면 초지진의 옛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아 사학자는 물론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초지진 관리사무소(930-7072)
8. 적석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210-3
적석사는 고려산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구려때 천축국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다섯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 합니다. 그 중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를 세웠는데 그곳이 이 절의 전신입니다. 적석사 뒤편 산정상은 낙조봉이라 불리며 이곳에서의 낙조는 강도팔경의 하나로 꼽힐만큼 아름답습니다.
찾아가는길 - 강화대교→강화읍지나 서문삼거리에서 좌회전→국화저수지→적석사입구
적석사 관리사무소 932-6191
출처 : 강화군 홈페이지
관광안내 : ☎ 032-932-5464 (역사관 관광안내소)
적석사는 고려산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구려때 천축국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다섯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 합니다. 그 중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를 세웠는데 그곳이 이 절의 전신입니다. 적석사 뒤편 산정상은 낙조봉이라 불리며 이곳에서의 낙조는 강도팔경의 하나로 꼽힐만큼 아름답습니다.
찾아가는길 - 강화대교→강화읍지나 서문삼거리에서 좌회전→국화저수지→적석사입구
적석사 관리사무소 932-6191
출처 : 강화군 홈페이지
관광안내 : ☎ 032-932-5464 (역사관 관광안내소)
원출처 : 강화군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