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와 주장/정치 사회

1983년 칼기폭파사건...미국, 소련의 관련

yygg 2009. 11. 29. 23:35

1983년 칼기폭파사건의 음모...미국의조작 [0]

 

약간 횡설수설하는 느낌도 든다. 고유 명사가 너무 많아 이해하기가 어렵다. - eyey

 

 

  • 미진 lim602**** 미진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16502 | 05.09.06 13:51 IP 211.108.***.17
    • 조회 1205 주소복사
    확실히 미국간첩비행기였다"

    1983년 KAL007 격추사건에 대한 러시아의 최신 해석

    중국시민






    중국에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하다는 신문이 하나 있다. 관영통신사인 신화사(新華社)에서 발행하는 일간지 <참고소식(參考消息)>이다. 최초에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이 국제정세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이 신문의 최대 특징은 세계 여러 나라 매스컴에 실린 글을 여과 없이 그대로 싣는다는 것이다. 중국독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제목을 새로 달더라도, 본문 앞에 꼭 원래 제목을 밝히어 원문을 100% 정확히 전달하려 애쓰는 것 역시 재미있다.

    한때는 “현퇀급(縣團級, 지방관으로는 현장, 군대로는 연대장)” 이상의 간부들만 볼 수 있는 내부신문이어서 이 신문을 본다는 사실 자체가 높은 지위를 상징했는데, 후에는 공개 발행하여 발행량이 엄청나다. 또 지금은 광고도 많이 실어 짭짤한 수입을 올린다.

    이런 신문을 보면 “세상을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늘 든다.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에 관심이 많은 중국인들은 이런 신문을 보면서 여러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습관을 기른다.

    필자는 이 신문을 무척 좋아하여 늘 사서 보는데 국제정세, 경제형편, 역사분석, 과학기술발전상황 등 많은 면에서 좋은 계시를 받기 때문이다.
    어제(9월 2일자) <참고소식>에 한국과 관계되는 글이 한 편 실렸다.

    1983년 칼007 격추사건에 대한 러시아의 최신해석이었다. 중국에서는 러시아 <모스크바공청단원보(莫斯科共靑團員報, 러시아음은 불명)> 8월 31일 자의 글 <냉전 기간의 한 차례 열전(熱戰)>이라는 글을 전재하면서 <그것은 확실히 미국간첩비행기였다>는 제목을 달았다. 또 앞에는 “러시아 학자는 22년 전 소련이 한국 여객기를 격추한 사건을 조사하고 인정하기를”이란 부언을 달았다.



    중국관영 신화사에서 발행하는 <참고소식> 9월2일자 기사 "그것은 확실히 미국간첩비행기였다"- 러시아 <모스크바공청단원보> 8월31일자 보도 번역기사 [제공= 중국시민]

    이 사건에 대해 한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연구해왔고, 할리우드에서 영화도 찍었다고 기억된다. 그래도 이번에는 당사자들의 구술과 군사전문가들의 분석, 그리고 비화가 섞이어 나온 글이니 그 나름의 가치가 크다는 생각이다. 한국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아래에 그대로 옮긴다. 소제목도 원래 대로이다. 충실히 옮겼으나 중역(重譯)이기에 러시아어 원문과 어느 정도 차이가 날지는 모르겠는데, 러시아어에 정통한 이들이 원문을 찾아 보다 정확한 내용을 한국인들에게 전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맨 뒤에는 부록으로 언젠가 인터넷에서 내려 받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첨부했다. 1983년에 나온 글로 보이는데 러시아인의 금년 주장과 대조해볼 재미도 만만치 않을 듯 해 붙인다. 참고로 필자는 개인을 상대로 한 음모론을 별로 믿지 않음을 말해둔다.



    * 아래 기사는 '중국시민'이 번역해 보내온 글입니다.

    [러시아 <모스크바공청단원보> 8월 31일 보도]

    냉전 기간의 한 차례 열전 (저자: 알렌산드르 코레스니코브)


    편집자의 말: 22년 전의 오늘, 미국 앵커리지에서 서울로 날아가는 보잉-747여객기가 사할린도 상공에서 소련군에 의해 격추되었다. 전 세계는 깜짝 놀랐다. 미국의 매스컴은 비행기 위에 도합 269명 승객이 있었는데 그중 미국시민 69명이 포함되었다고 주장했다. 워싱톤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하고 악의 제국 소련에 과단한 행동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세계는 핵전쟁의 냄새를 맡았다.
    군사역사학자 알렉산드르 코레스니코브교수는 여러 해동안 줄곧 이 사건의 조사사업에 종사해왔다. 그는 놀라운 말을 한다.

    “이제는 단언할 수 있다. 이는 나토에서 알심 들여 기획한 간첩행동이었다고. 우리 사람들이나 미국인들이나 다 처음부터 이것이 간첩비행기였음을 알고 있었다. 이는 사실 한 차례 전투였고, 죽은 자는 정부 측에서 선포한 그 269명 승객이 아니라 29명 스파이였다.”

    이상한 불청객

    8월 31일 깊은 밤에 보잉-747비행기 한 대가 소련 변경을 넘었다. 이런 일은 이전에 늘 일어났으나 언제나 별일 없이 무사했다. 일반적으로 소련 측에서 “비행기가 항로에서 벗어났다(중국어의 迷航은 실수나 잘못으로 항선을 벗어났다는 의미)”는 통보를 받게 되고, 그 다음 불청객은 소련 공군 추격기(중문으로는 殲擊機)의 동반 하에서 신속히 소련 영공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잉 비행기가 소련 군부의 경고를 무시하면서 떠나지 않았고 도리어 소련 방공시스템의 사격거리를 벗어난 다음 소련의 핵잠수함기지 상공에 이르렀다. 이 기지에는 대륙간장거리미사일이 배비되었는바 소련군의 극비 중요지역이었다.

    군사전문가들은 여러 해 동안 왜 소련군부에서 보잉여객기가 그 기지 상공에 날아오기 전에 격추하거나 부근 비행장에 강박 착륙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극동군구사령이었던 이완 트레지야크대장(후에 소련방공군총사령을 맡음)은 그 속의 비밀을 이야기했다.

    “나는 나이를 이미 많이 먹어 무서워할 게 없다. 20여 년이 지나갔고 소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진상을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보잉비행기가 우리나라 영공에 들어오는 그 시작부터 우리는 이미 비행조 성원들이 나토정보부문과 통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비행기를 격추할 기회가 아주 많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행기가 만약 캄챠카(Kanchatka) 반도 상공에서 폭발하면 잠수함이나 다른 시설에 있는 핵무기가 터지도록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헤아리기 어려운 손실을 받게 된다. 둘째, 만약 우리가 상대방을 강박해 우리 군용비행장에 착륙시킨다면 미국인들도 비행기를 폭발시킬 수 있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전략항공모함이 바로 부근에 정박했는데, 그 위에도 핵무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표현이 그치지 않아

    후에 진행된 조사는 이 판단을 증명하였다. 전문가들은 비행기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일치한 결론을 내렸다. 구체경과는 다음과 같았다. 소련 추격기가 미사일을 발사해 비행기를 명중한 다음 비행기는 또 17킬로미터를 날아 중립수역에 이른 뒤에 폭발했다. 폭발전문가들은 비행기가 내부폭발로 인하여 해체되었으며 폭발 위력은 4톤 티엔티 폭약에 해당한다고 인정했다. 소련의 미사일은 근본 이렇게 큰 위력을 갖추지 못했다.

    트레지야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전문가들은 당시 벌써 비행기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인정했다. 왜냐하면 잔해들은 골고루 흩어져 떨어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큰 잔해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폭발의 위력을 알만 하다. 때문에 이것은 간첩비행기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비행조성원들의 몸에는 아마도 원격조종설비가 있어 일단 강박착륙하게 되면 비행기를 폭발해버릴 수 있었다고 짐작된다. 이렇게 하면 비행기의 정찰설비와 모든 비밀장치가 가뭇없이 사라진다.”

    이 보잉-747비행기의 이번 비행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앵커리지에서 이륙할 때 비행기는 연유 4톤을 보충했는데 서울로 날아가려면 이렇게 많은 연료를 쓸 필요가 전혀 없다. 이밖에 비행기 이륙시간도 40분 뒤로 미뤄졌다. 결과 비행기가 소련 국경에 이르렀을 때, 미국의 정찰 위성이 마침 캄챠카 반도 상공에 도착했다. 트레지야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그 때 이미 비행기가 위성에 비밀암호문건을 발송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밖에 또 한 가지 점이 나의 의심을 자아냈다. 우리는 부근에 미사일 대대 둘을 배치했는데, 비행기는 마침 두 대대 사이의 틈으로 빠져나가 누구도 그를 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두 당사자의 회억을 들어보자. 그 중 한 사람은 추격기 비행사 오시보위치 중좌이다. 처음에 그는 보잉비행기를 강박해 착륙시키려 생각하고 국제통용신호를 보냈다. 그 다음 그는 포를 쏘아 경고사격을 했는데 포탄이 보잉여객기의 앞으로 높은 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포구에서 뿜어나오는 불길은 지면에서도 빤하게 보였다. 그러나 상대방은 처음에는 아랑곳하지 않다가 다음에는 갑자기 속도를 높여 달아났다. 오시보위치는 바싹 쫓아가다가 상대방을 격추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비행기를 격상했을 뿐 격추하지 않았다. 나는 내 눈으로 그가 날아서 현장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았다.”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가?

    발포명령을 내린 사람은 항공사단 사단장 아나토리 이르노코브소장(후에 러시아 공군총사령을 맡음)이었다. 그는 후에 명령을 받들고 보잉여객기 승무원 가족들과 만날 때 자신의 의혹을 직접 표명하였다.

    “보잉-747은 현대화 항공유도(중국어로는 導航)설비를 장착했는데 그가 항선에서 멀리 벗어나도록 왜 비행조성원들이 몰랐는가? 또 제때에 비행방향을 수정하지 않았는가? 무엇 때문에 비행조성원들은 추격기가 보낸 신호와 경고성 사격에 전혀 반응이 없었는가? 미국과 일본의 지면감시통제일군들은 왜 시종 보잉비행기의 비행방향착오를 시정할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비극이 발생하는 것을 구경만 했는가? 왜 소련과 연계하여 필요한 데이터를 알리지 않았는가?”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소련 지도자는 당시 어디에 있었는가? 왜 비행기를 격추하는 이런 생사가 걸린 결정이 한낱 사단장에 의해 내려졌는가? 원인은 아주 간단했다. 당시 소련공산당 중앙총비서 안드로포프는 병원에 누워있었다. 그의 경호원 알렉산드르 코르자코브중장은 당시의 상황을 회억한다.

    “그날 나는 안드로포프의 곁을 지키면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늘 혈액 투석(透析)을 하면서 숨이 겨우 붙어있었다. 우스지노브(<참고소식> 주해: 소련 국방부장)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그와 한국여객기 문제를 상의하려 했는데, 그는 몸이 아주 불편함을 느꼈기에 누구도 감히 그에게 폐를 끼치지 못했다. 우스지노브 자신은 감히 함부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총참모장 오가르코브도 감히 비행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외교부, 국방부와 까께베(KGB)는 모두 위의 지시를 기다렸다. 최고지도층은 사실상 이미 마비상태에 빠졌다.”

    소련과 미국은 비밀교역을 이뤄

    그러면 비행기에는 도대체 몇 사람이 있었는가? 바다에서 건진 상황은 비행기 위의 승객이 제일 많아 29명을 초과하지 못함을 표명했다. 헌데 왜 269명의 짐이 있는가? 게다가 이상한 것은 이 짐들이 줄줄이 꿰어져 하나로 묶인 것이다. 트레지야크는 이렇게 한 목적은 분명 물살이 짐을 밀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이렇게 하면 도합 269명이 죽었음을 중명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 승객들은 앵커리지비행장에서 이륙하기 전에 이미 비행기를 떠났다.

    이 사건의 조사에 참여한 여러 국제위원회는 모두 소련 측의 처사가 국제관례와 국제법에 맞다고 승인했다. 누구도 소련에 정식 공소를 하지 않았다. 소련도 피해자가족에게 그 어떤 배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미국 당국이 소련과 이룬 교역이었다. 우리가 당신들이 죄가 없다고 인정할 테니, 당신들은 격추된 보잉비행기가 간첩비행기라는 사실을 공포하지 말아달라. 일은 이렇게 해결되었다.

    후에 옐친이 서울을 방문할 때 정식으로 한국에 사과하고 정중하게 그 보잉여객기의 블랙박스 두 개를 한국 측에 넘겨주었다. 허나 한국 측을 크게 실망시킨 것은 블랙박스가 빈 것이었다. 대통령사무실 주임 베드로브가 당시 옐친에게 넘겨준 것이 바로 이런 빈 함이었다. 옐친은 이 일을 알게 된 다음 대노하여 당장 베드로브를 철직시켰다. 그러나 블랙박스 속의 필름은 이 때문에 러시아에 남아 다시 빛을 볼 시각을 기다리고 있다.(끝)



    * 아래 기사는 1983년 KAL007기 사건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미 하원의원 래리 맥도날드가 의도적으로 살해됐다는 주장과 관련된 한 글을 '중국시민'이 번역해 보내온 글입니다.- 자주민보 편집자 주

    부록: 누가 Larry McDonald 의원을 살해했는가?

    누가 래리 맥도날드(Larry McDonald) 의원을 살해했는가 - KAL007기폭파의 배경

    [로마카톨릭]Mae Brussell

    우익 열광주의자를 제거하려 했던 사람은 많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는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이 쥐고 있을 것이다.

    지난 9월 1일 대한항공 여객기 참사의 여파로 LA 헤랄드 Examiner의 편집진은 성가신 질문에 답변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그 가운데 주요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질문: 극우파 하원의원인 죠지아 주의 로렌스 맥도날드(Lawrence McDonald)가 007편 KAL대한항공 여객기를 타고 있는 동안 고의로 암살되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가?

    답변: 미국 정부는 그러지 않았지만, 맥도날드의 미망인은 존 버치 소사이어티(John Birch Society)의 의장이었던 자신의 남편이 살해되었다고 주장한다. 남편은 미국 정부 내에서 선도적인 반공산주의자였기에 그 여객기가 소비에트 영공으로 진입하여 격추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질문으로는 어째서 소련이 맥도날드 의원을 희생자로 삼으려 했는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러시아인이 테러 전문가라면 소비에트 영공 내에서 여객기를 2시간 반 동안 추적하지 않고도 그 하원의원을 간단히 제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라도 쉽게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마치 거대한 기계 장치에 따라 맥도날드가 적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듯이 대한항공KAL 007편이 소비에트 영공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믿기 어렵다. 이상하게도 그 2시간 반 동안 007편은 소비에트 영공 내에서 226마일이나 비행하는 모험을 했는데, 그 당시 소련은 비행 영역 바로 아래 지역에서 신형 미사일을 시험하고 있던 중이었으며, 문제를 더 발생시킬 필요가 없었다.

    또한 맥도날드와 같은 열광주의자가 '미국 정부 내 선도적인 반공산주의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지도 의심스럽다. 맥도날드는 여러 사람들, 곧 A.G. Fritz Kraemer, Svend Kraemer, John Lenczowski, Paula Doriansky, William Clark, Jeane Kirkpatrick, William Casey, Henry Kissinger, Dr. Ernest Lefevre, William F. Buckley, James Buckley, Richard Pipes, General Daniel O. Graham 등과 숨가쁜 경쟁을 해야 했을 것이다.

    007편의 격추 직후 어느 기사에서는 해군성 장관 존 레히만(John Lehman)이 사할린 섬 상공에서 KAL승객 269명의 목숨을 앗아간 장본인이라고 비난했다. 방위권 내의 '수평적 단계적 확대'라는 제목이 붙은 레히만 계획에서는 소련에 대한 일련의 도발 작전이 설명되어 있다. 레히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북태평양 지역에서 먼저 발사 신호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전술적으로도 많은 장점을 얻게 된다. 이 지역에서 소련과 격돌할 가능성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과 미국은 한편으로 NATO 미사일 논의에 대해 대중의 관심을 전환시키려고 하면서 태평양 지역에서 첫 공격을 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고 있었다. 한국, 일본, 미국이 이 계획에 함께 참여했다. 소련 영공에 스파이 여객기를 보냈으니 도발을 받을 만하다.

    007편 사고가 있은 지 5일 뒤에 전 CIA 스파이 랄프 맥기히(Ralph McGehee)는 대학 강연에서 대한항공이 스파이 임무를 수행했다고 말했다. 또한 소련은 007편이 RC-135 인텔리전스 비행기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맥도날드를 미국의 한국전쟁 공식 참전 30주년 기념식에 참가하도록 초청을 주선한 인물은 상원의원 제시 헬름스(Jesse Helms, 공화당, 노스 캐롤라이나 주)였다. 제시 헬름스도 역시 극보수주의자로서 반소, 반정부, 반공산주의자이며, 인종 학살에 대한 국제 협약에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헬름스와 맥도날드는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타고 한국행 비행의 첫 번째 정거장인 알라스카의 엥커리지에 도착했다. 미국 대표단 36명 가운데 맥도날드만이 따로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도 이상하다. 헬름스가 탄 보잉 747기는 연료를 재공급받은 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나 맥도날드가 탄 007편은 불행을 맞이했다.

    이안 플레밍(Ian Fleming)이 저서에서 기술했듯이 007편은 제임스 본드처럼 '살인 라이센스'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 '살인 라이센스'를 누가 주었는가? CIA와 한국의 KCIA였는가? 이 두 기관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조직되어 함께 공작을 펼쳤다.

    맥도날드가 헬름스와 다른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을 보면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발생한다. 맥도날드 옆에 탔던 사람은 누구였는가? 그 옆 좌석의 탑승권은 대한항공이 쥐고 있었다. 아무도 그 옆 좌석에 타지 않았다면, 맥도날드는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가던 참이었는데 어째서 미국 대표단 가운데 어느 한 명이 그 좌석에 타지 않았는가?

    맥도날드의 Western Goals Foundation(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의 정보뱅크로서 좌익·인종 그룹 및 개인에 대한 부정적 정보를 다루는 국립 우익 정보 센터) 소속 참모와 보좌관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어째서 맥도날드는 혼자 죽어가야 했는가?

    007편의 소비에트 영공 침범에 따라 실제로 이득을 얻은 사람은 누구였는가? 러시아인이 아니다. 소련은 당시 그 다음 주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열릴 미국 국무장관 죠지 슐츠(George Shultz)와 소련 외상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Gromiko)의 회동을 비롯하여 군축 협상 및 UN 연례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고가 일어난다면(물론 실제로 일어났지만) 결정적인 시기에 세계 여론이 악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에 미국 정부는 격추 이전의 비행 시간 동안을 통해서 소비에트 레이더와 방위 체제에 대해 귀중한 군사 정보를 얻었다.

    다음으로 국무성과 국방성은 무릎반사처럼 즉각 반응을 보인 의회를 통해 MX 미사일과 바이너리 신경 가스(binary nerve gas)에 대한 표결을 유리하게 통과시킬 수 있었다.

    분명한 것은 맥도날드가 소련의 음모자들에게 살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맥도날드의 비극적 종말은 그의 비밀 행동에 대해 최근에 밝혀진 사실로 설명해 볼 수 있다. 일찍부터 있었던 맥도날드와 레이건 대통령 사이의 관계는 추격 사건 직전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의로운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을 달성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감추어져 있던 정부의 스파이 첩보 활동은 그 당시 노출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언론 매체를 비롯하여 여러 기관과 개인들은 1980년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이래 레이건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에 관한 어두운 측면을 의도적으로 보류시켜 놓았었는데, 그 당시에는 지난 날의 어두운 측면들이 누설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로날드 레이건의 주요 지지자, 후원자, 피지명자들은 언제나 정치 스파이 활동에 개입했다. 캘리포니아는 음모가 무르익는 곳이다. 닉슨(Nixon)과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출신이다. 또한 캘리포니아는 거품과 같은 계획이 끓어오르는 곳이다.

    레이건과 맥도날드 사이의 관계는 오래되고 사연도 많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레이건이 주지사 시절에 고용한 정보 수집가들과 맥도날드가 운영하는 Western Goals Foundation(W.G.F)의 활동 사이에는 충돌이 있었다. 양쪽 모두 동일한 방법을 사용했으며 동일한 인물들을 개입시켰기 때문이다.

    1980년 8월 15일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보다 더욱 심한 일이 일어났다. 램파츠(Ramparts) 잡지의 전 편집장이었던 워렌 힌클(Warren Hinckle)이 당시 제리 듀코트(Jerry Ducote)의 첩보 활동에 로날드 레이건이 주지사 시절에 임명한 참모들이 관여되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듀코트는 레이건의 지지자들이 고용했던 전 부보안관으로서 국가 전복 계획의 혐의가 있는 단체들에 침투하는 활동을 했다).
    힌클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산타 클라라 카운티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은 다음 1년 반 동안 최대 스캔들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워터게이트와 더불어 음모는 모두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사건이야말로 워터게이트의 후속판이다."

    힌클의 예측이 있은 지 거의 1년 반이 지난 1983년 1월 4일 LA 경찰국의 제이 폴(Jay Paul) 형사는 지쳐 있는 수사팀에게 맥도날드와 로날드 레이건 사이의 연결점이 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주었다. 그래서 맥도날드는 자신이 일하던 그 큰 네트워크 속에서 유용성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 주요 인물들의 걸림돌이 되었다.

    치밀하게 구축된 기만 조직이 와해된 까닭은 LA 경찰국(LAPD)의 대중 소동 인텔리전스 부서(PDID)가 선량한 시민들에 대해 불법으로 작성한 파일이 대규모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파일은 1975년 파기시키도록 되어 있었지만, LAPD의 간부들이 정보뱅크의 정보를 유지시킨 까닭에 나중에 발견되고 말았다.

    LA 경찰국장은 파일 파기 명령 불복종에 격분하여 파일을 내놓으라고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토마스 셰이데커(Thomas Scheidecker) 경위가 1만 페이지 이상의 서류를 훔쳐간 다음이었다. 그리고 PDID의 제이 폴 형사는 거대한 파일 뭉치를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 있는 자신의 집 차고로 옮겨서 아내인 변호사 앤 러브(Ann Love)에게 1년에 3만 달러를 주면서 10만 달러짜리 고급 컴퓨터를 사용하여 파기하도록 되어 있는 그 정보를 입력시키도록 했다.

    그 정보는 결국 W.G.F.의 컴퓨터 속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이건 또 어찌된 일인가? 앤 러브에게 비용을 지급한 사람은 바로 W. G. F.의 운영자 래리 맥도날드 의원이었다.

    그물망에 걸린 사람으로는 존 리스(John Rees)도 있었다. 존 리스는 W. G. F.의 편집장이었으며, 제리 듀코트와 함께 보스를 모시며 비슷한 방식으로 데이터를 수집했다. 이 두 사람은 선동 요원으로 활약했다.
    러시아 군사 정보국(Imperial Russian Military Intelligence)의 대령 빅토르 카레딘(Victor Kaledin)에 따르면 "선동 요원이란 어느 정치 조직에 들어가 불만을 조성하거나 문제가 있는 조직에 대해 고용주에게 행동권을 부여해 주는 경찰 요원"이라고 한다.

    로날드 레이건의 지지자들과 존 버치 소사이어티는 듀코트를 고용하여 그런 행동을 하도록 했다. 존 리스는 버치 소사이어티 및 거의 모든 우익 단체에서 일을 하면서 그 단체들의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혼란시킬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레이건의 부하 듀코트와 맥도날드의 친구 존 리스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웨스턴 리서치(Western Research-Research West라고도 함)에서 함께 일을 했다. 듀코트는 표적 없는 문 뒤에 숨어서 산업계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업을 진행했다. 이 스파이 활동의 결과는 레이건 주지사가 좌익 성향을 지닌 채 자신의 신념에 대해 반대하는 잠재 고용주들을 제거하는 데 사용했던 정보에 추가되었다.

    이와 동시에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요원들은 분규와 시위에 관한 사진 및 지하신문을 웨스턴 리서치에 제공해 주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웨스턴 리서치는 고용주들에 대한 배경 정보를 판매하면서 위험 가능성이 있는 업체들에 관해 조언을 해 주었다.

    웨스턴 리서치는 나중에 Research West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법률 집행 기관 및 사적 정보 뱅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스파이를 통해 반핵 운동가들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발전소에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분명한 것은 수년 전에 죠셉 맥카시(Joseph McCarthy) 상원의원이 사망했는데도 블랙리스트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녀사냥식 수색은 끝날 줄을 몰랐다.

    지난 1월 로스앤젤레스의 미국 시민 자유 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은 불법 스파이 활동을 당한 131 법률 준수 그룹 및 개인들을 대신하여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의 피고 가운데는 LAPD 대중 소동 정보국 소속 경찰관 54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피고들을 대표했던 변호인은 깁슨(Gibson), 던(Dunn), 크러쳐(Crutcher)였으며, 이 고도로 민감한 소송 파일은 래리 맥도날드 의원의 W. G. F.으로 흘러 들어갔다. 또한 이상하게도 검찰총장 윌리암 프렌치 스미스(William French Smith)는 그 변호인단 소속 회사의 파트너였다. 또한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 이외에는 개인적인 문제에서 깁슨, 던, 크러쳐의 고객이 되었던 사람은 없었다.

    어떻든 세월은 흘러갔고 래리 맥도날드는 여러 해 동안 비밀을 훔치고 도청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하여 로스앤젤레스 주 대법관의 소환을 받게 되었다. 맥도날드의 증언, 특히 롱 비치 컴퓨터에 어떻게 불법으로 경찰 정보 파일을 입력했는지에 대한 증언은 유력 인사 상당수가 타격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007편 사고 이후 몇 주일이 지나서 소련의 유리 안드로포프(Yuri Andropov)는 이 사고가 '미국 특별 기관의 조종을 받은 교묘한 도발이며 극단적인 정치 모험주의의 사례'라고 하면서 미국을 비난했다.
    미국이 어떻게 그런 대본을 마련할 수 있었는가? 캘리포니아의 문서 자료가 너무 많이 노출된다면 래리 맥도날드는 분명히 레이건 대통령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공통의 적을 맞이하고 있었으며 동일한 스파이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CIA와 FBI 및 맥도날드와 함께 일하는 연방 기관들, 특히 국방성은 맥도날드를 즉시 침묵시키려 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또한 맥도날드는 격렬한 반공주의자였기에 소비에트가 그 살인에 책임이 있다고 뒤집어씌울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와 싸우는 데는 정의로운 순교자를 새로 만들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납치한 푸에블로(Pueblo)호 사건을 기억해 보라.

    이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이 작성되었다고 본다.
    *9월 초 한국에서 기념회가 열린다. 맥도날드는 통일교의 문선명 목사 및 한국군과 우호 관계가 깊다. 맥도날드를 한국의 기념회에 참가시키자.*

    워터게이트 피고인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의 아내이자 CIA 간부인 도로시 헌트(Dorothy Hunt)는 민간 항공기를 탄 채 시카고 상공에서 사라졌으며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었던 일차 증인들은 그 죽음을 보고 놀라서 침묵을 지켰다. 당시는 닉슨이 대통령직을 퇴임하기 앞서 '유죄 변론'을 하는 증인들에 대해 보복을 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우연히도 하워드 헌트와 맥도날드 의원의 스파이 활동은 로스앤젤레스 경찰국과 관련이 되었다. (불길한 관련 뒤의 사실(The Facts Behind a Sinister Connection) 참조)

    *우리는 스파이 비행기를 끊임없이 소련 상공으로 보낸다. 소련은 그 비행기들의 자국 영토 침해를 바라지 않는다. 맥도날드를 민항기에 태워 소련 영공을 침입하도록 함으로써 동시에 스파이 비행기 작전을 수행하면 미사일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007편의 사고 원인으로서는 조종사들과 미국, 한국, 일본의 청음 초소(listening post) 사이에 대화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무선이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007편이 뉴욕 시 케네디 공항을 떠날 때에는 방위용 무선장치와 방위용 항해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앵커리지에 도착하고 난 뒤에는 조종사가 기능 이상 부분을 수리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러시아 국경선 어느 일정 지점 이내로 항공기가 비행하면 강제 착륙을 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격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소련 영공을 비행하는 조종사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CIA와 국가방위국(National Security Agency)이 래리 맥도날드의 죽음을 바랐다면 국제적인 사고를 일으키고 조종사들에게는 어떤 지시나 경계도 주지 않는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무선 전송을 억제하든지 조종사들의 마음을 억제하든지 하는 방법밖에 없다.

    007편의 조종사 전병인 씨는 한국 공군의 대령 출신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었기에 1982년에는 한국 대통령을 태운 미국행 비행기의 조종을 맡기도 했다. 또한 이어서 동남아시아와 중동, 파리, 로스앤젤레스, 뉴욕을 거쳐 서울까지 비행했다.

    007편의 동료 조종사는 손동희 중령이다. 새로운 보고서에 따르면 전 대령은 자신이 미국 정보 기관의 특별 임무를 수행했다고 친한 친구들에게 자랑했으며, 소련의 군사 시설을 탐사하는 데 사용하는 비행기 스파이 장비 일부를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 스파이 활동은 뉴욕 시에서 시작되어 서울에서 끝나는 정규 민항 계획의 일부였다.

    007편 참사 이후, 연료 소비를 줄이기 위해 소련 영공으로 비행했다는 해석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항공기가 자주 길을 잃는 이유는 소련 군사 기지를 촬영하는 스파이 카메라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항공은 1970년대 초 CIA와 비밀 협약을 맺고 소비에트 영토를 관측하는 첩보 활동을 수행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에서는 또한 007편이 격추될 당시 그 상공에는 정찰 위성이 지나가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다고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소련의 항공 방위 시스템의 위치를 전자 트래픽 방식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위협 경고를 주기 위해 그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소련에 대해 레이더의 위협 경고를 유발시킨 다음, 미국 RC-135 정찰기는 미국 정찰기에서 자주 사용하는 대로 교묘한 수단을 사용하여 소련의 항공 방위 시스템을 무력화시켰다. 곧 캄챠카(Kanchatka) 반도를 덮고 있는 레이더망 아래로 비행하여 항공 방위 승무원들을 교란시킴으로써 007편이 발각되지 않고 소련 영공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조종사 전 씨는 소련 영토 내 226마일에 있는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고도를 35,000피트로 높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잠시 뒤 007편이 미사일을 맞자 "급속한, 급속한 감압이 생겼다"고 소리쳤다.

    전 씨의 마지막으로 무선 전송을 통해 '원 제로, 원 제로 델타'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다. 일본 음향 연구소(Sound Research Institute)의 소장 마수미 스즈키(Mathumi Suzuki) 씨도 일본 방송국 NHK도 그 '델타'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그것이 전 씨의 '쉿!'이란 침묵의 사인이었던가?

    참사 이후 첫 보도에서는 007편 조종사들과 분명히 접촉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항공기가 납치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했다. 두 번째 보도에서는 두 조종사와 항공사가 잠을 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조종사들의 전문 경력을 고려해 보면 설득력이 없는 소리이다.
    승무원들이 앵커리지를 떠나기 앞서 미리 지시를 받고 최면술과 마인드컨트롤에 빠져 그 이후의 메시지를 수신하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이것이 무리한 해석이라면 캔디 존스(Candy Jones)의 사례를 들어보자. 존스는 유명한 모델이자 방송인으로서 CIA가 자신의 마음을 조종해서 스파이 활동이나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도록 했다고 자서전을 통해 밝혔다. 낯모르는 사람이 전화 한 통화만 해도 자살하라고 이전에 마음에 주입시킨 바를 충분히 실행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 사실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공개되었으며, 이와 함께 이전에 CIA에게 심부름을 해 준 증거도 공개되었다. 남편이 개입했기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다.

    참사 이후 007편의 방위 항해 시스템 문제도 정밀 조사되었다. NASA의 보고에 따르면 007편과 동일한 항해 장비를 장착한 미국 여객기가 지난 5년 동안 적어도 25차례나 항로를 이탈했으며, 250마일이나 이탈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 문제의 이유로는 컴퓨터 기능 이상과 인간의 실수가 거론되었다.

    팬암항공사의 조종사 토마스 폭스워드(Thomas Foxworth)는 이렇게 말했다. "장기 비행에서는 안심하기 쉽다. 곧 인간의 실수로 참사가 일어났다고 본다. 기록을 보면 조종사가 잠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실수'란 마인드컨트롤 계획에 따라 일어났는가? 007편 승무원 2명은 잠들었을 수도 있으며, 죽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델타'라고 말한 사람은 분명히 끝까지 깨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조종사의 경력과 전문지식을 감안한다면 발생하고 있는 일에 대한 반응은 외부 물체나 소리에 관계없이 계속 비행하라는 지시가 프로그래밍된 초자연적인 것의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4년 11월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샘 어빈(Sam Ervin)이 운영하던 Constitutional Rights의 소위원회는 '행위 조정에 대한 개인의 권리와 연방 정부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645쪽짜리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CIA의 마인드컨트롤 작업과 테스트 방법이 진전되어 있는 상태임을 지적했다.

    3년 뒤 그 상원 정보위원회와 건강 및 과학연구 소위원회는 'Mkultra 프로젝트: 행위 조정에 대한 CIA 프로젝트'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의 요지는 국방성은 원하기만 하면 마인드컨트롤을 위성 방위 시스템과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마인드컨트롤을 논리적으로 사용한다면 조종사의 정상 비행을 가미가제 작전과 마찬가지로 전환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죠시 델가도(Jose Delgado) 박사는 일찍이 1971년에 그 절차를 완성해 냈다고 한다. 그 박사는 군사 및 방위 마인드컨트롤 실험의 아버지로서 CIA 및 해군 정보 부서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그 박사는 스페인계 투견의 두뇌에 리서버 이식 수술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 마드리드 지역에서 작은 무선 통제 전극을 통해 분노한 그 개의 마음에 미세한 전류를 통하게 하자 갑자기 분노를 멈추었다고 한다.

    델가도도 역시 감정 조절제를 두뇌에 주입시키는 방법을 개발해 냈다. 감정 조절제를 투입한 뒤 원격 컴퓨터로 불안, 우울, 격노 등을 감지하여 진정시킨다. 그러면 억제되었다는 신호가 무선으로 되돌아온다. 델가도는 이렇게 말했다. "이 프로그램이 적용된 개인은 현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자신의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일 뿐이지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지니고 있는 상대적 준거 틀은 아니다."

    이처럼 물리적으로 마인드컨트롤을 수행하는 이유는 개인의 의식적인 노력과 관계없이 그 두뇌를 활성화하여 개인적인 통제 범위 이상으로 지시를 내림으로써 외부의 힘이 개인의 신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측정하도록 하는 데 있다.

    KAL 007편은 최신 경로 탐색 기술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컴퓨터 3대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1초에 7차례나 알려 주는 관성 항법 시스템은 1년 전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소련의 미사일 공격에 따라 래리 맥도날드 의원이 사망한 데는 다음 요인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1)인간적인 요인
    (2)뉴욕 시나 앵커리지의 기기 변경
    (3)한국 공군 출신 조종사들에 대한 마인드컨트롤

    관직을 그토록 많이 차지할 정도로 이상하면서도 복잡한 인물 래리 맥도날드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먼저 맥도날드는 의사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비뇨기과 전문이며 암 환자들에게 레이어트릴(laetrile)을 조제해 주었던 경력이 있다.

    또한 총기를 200정이나 감추어 두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1974년에는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나중에는 면세로 운영하는 W. G. F. 및 존 버치 소사이어티의 의장이 되었다.

    '래리 맥도날드 파이' 를 보면 전세계의 군사 및 법률집행 기관과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맥도날드가 복잡하면서도 비밀스런 삶을 살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가장 쉽게 설명하자면 맥도날드의 여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면 된다. 맥도날드는 의원 사무실 벽에 사진 두 장을 걸어놓았다고 한다. 그 그림을 보면 그의 정신 상태에 관해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하나는 죠셉 맥카시(Joseph McCarthy) 사진이다. 또 하나는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사진이다. 상원의원 맥카시는 2차대전 이후 위스콘신-프랭크 소센브렌너(Wisconsin-Frank Seusenbrenner) 및 웨이터 하르니시페거(Waiter Harnischfeger)라는 두 나치 공범자의 재정 지원을 받아 상원의원 생활을 시작했다. 프레드 쿡(Fred J. Cook)의 저서 「10년 동안의 악몽」에서는 맥카시의 친나치 지원자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 놓았으며, 그 상원의원이 그 열정적인 극우주의와 히틀러 찬미에 얼마나 열성이었는지 밝혀주고 있다.

    사실 하르니시페거의 조카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친필본을 자주 보여 주었다고 한다. 또한 나치의 기장에 대해 자랑을 했다고도 한다.
    1946년 12월 히틀러의 고위 군사 간부 43명은 프랑스 말메디에서 미군 병사를 유혈 학살한 혐의로 다챠우(Dachau) 공판에서 사형 또는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맥카시가 상원의원으로 들어간 주요 목적은 그 전범들의 석방을 추진하는 일이었다.

    1949년 의회 청문회를 주도함으로써 그의 노력은 보상을 받게 되었다. 나치 전범 43명은 석방되었다. 맥카시가 1953년 하원 비미국인 활동 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HUAC))를 조직하여 장래의 파시스트 활동 목적을 선량한 시민들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을 때 그 정보는 대부분 미국 정보기관과 나치 전범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오데사(Odessa)라는 스파이 정보망에서도 광범위하게 파일을 수집했다. 오데사(Odessa)는 제3제국이 소련에 대한 전쟁에 승리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조직된 기관이다.

    1957년 맥카시가 사망한 뒤 래리 맥도날드는 루이스 리스(Louise Rees)를 통해서 전세계 수백만의 인명이 담겨 있는 방대한 컴퓨터 파일을 인수받았다. 루이스 리스는 맥도날드의 W. G. F.의 편집장 존 리스의 아내로서 맥카시와 로이 콘(Roy M. Cohn - McCarthy의 1953년 정부활동위원회 영구조사 소위원회 고문)을 위해 일한 경력이 있다.

    Western Goals는 현재 뉴욕 시 변호사가 된 로이 콘을 고문단 명부에 올려 놓았다. 또한 맥도날드가 1974년 죠지아 주의 의원으로서 워싱턴으로 가게 되자 루이스 리스는 그의 유급 보좌관이 되었다. 맥도날드가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존경하고 있음은 그 두 사람이 모두 국제 파시스트 조직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설명해 볼 수 있다. 또한 나치가 위스콘신 주에서 맥카시에 대해 선거 자금을 제공해 준 것처럼 칠레의 나치는 피노체트의 지시에 따라 1974년부터 맥도날드의 의원 선거 운동 자금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맥도날드가 사망한 바로 그날 밤 그 지원자 피노체트는 칠레의 소요 군중들에게 모욕을 당했다. 칠레 군중들은 그 악몽같은 10년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피노체트는 DINA(나치와 유사한 암살 테러단으로서 칠레 경찰에 소속되어 있으며 억압 정부를 유지시키는 일을 수행함)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DINA의 공포 및 고문 수단이 없었다면 칠레 내 미국의 괴뢰 정부는 단 하루도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피노체트는 또한 콜로니아 디그니다드(Colonia Dignidad)가 하는 일을 그대로 묵인해 주었다. 콜로니아 디그니다드란 아르헨티나와 칠레 국경 지대에 있는 나치 전범의 피난처로서 피노체트에 반대하는 자들을 절단시켜 산 채로 개에게 먹이로 주기도 하는 고문 센터였다. 무장 부대가 있으면 스파이 활동이 어렵게 된다. 국제사면위원회는 현재 이 통탄할 만한 사실을 조사하고 있다.

    래리 맥도날드가 칠레 정부와 불미스럽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로버트 비이론 왓슨(Robert Byron Watson)이 하원 암살 특별조사위원회에서 맥도날드가 칠레 산티아고의 푸아드 하바쉬 안사레(Fuad Habash Ansare)와 거래하고 있었음을 자세히 밝혀주는 선서진술서를 변호인들에게 제시함에 따라 더욱 널리 공개되었다. 이 선서진술서에서 왓슨은 푸아드 하바쉬가 아랍 테러 지도자이자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의 지도자인 닥터 죠지 하바쉬(Dr. George Habash)의 동생이라고 주장했다. 그 조직은 CIA와 함께 아랍 테러리스트 살인범들을 전세계에 배치시켜 주었다고 한다.

    훨씬 더 사악한 조직인 래리 맥도날드의 W. G. F.은 1979년 조직되었다. 그 고문단 명부는 브로셔로 작성되어 신문 광고에 실렸다. 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Jean Ashbrook, Mrs. Waiter Brennan, Taylor Caldwell, Roy M. Cohn, Philip M. Crane 의원(공화당-Illinois 주), Raymond Davis 장군, Henry Hazlitt, Dr. Mildred F. Jefferson, Dr. Anthony Kubek, Robert Milliken, Thomas H. Moorer 제독, E.A. Morris, Lloyd M. Mustin 부제독, Mrs. John C. Newington, George S. Patton III 장군, Dr. Hans Sennholz, John Singlaub 장군, Dan Smoot, Robert Stoddard, Bob Stump 의원(민주당-Arizona 주), Mrs. Helen Marie Taylor, Dr. Edward Teller, Lewis Walt 장군, Dr. Eugene Wigner. Western Goals의 집행진은 감독 린다 구엘(Linda Guell), 편집장 존 리스(John Rees), 연구 보조원 쥴리아 퍼거슨(Julia Ferguson)으로 구성되어 있다.

    Western Goals의 두 구성원에 특별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세이무어 헐쉬(Seymour Hersh)의 최근 저서 「닉슨의 백악관 내 권력의 대가」에 따르면 토마스 무어러(Thomas Moorer)는 닉슨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예민한 데이터를 비밀리에 제거하는 일을 감독했다고 한다. 무어러는 예오만 챨스 레드포드(Yeoman Charles Radford)를 통해 분명히 '대통령 전용'이란 마크가 붙은 서류를 훔쳐서 국방성에 전달했다고 한다.

    무어러는 이 일급비밀 서류를 훔쳐 제공해 준 대가로 영예의 참모총장직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캄보디아여! 메리크리스마스!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와 무어러 제독은 의원들을 모두 피해가면서 그 나라(미국과 한 번도 싸워보지 않은 캄보디아)에 대해 폭격 표적을 선택하여 수백만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전쟁을 자신들의 뜻대로 수행했다.

    나중에 무어러와 맥도날드는 2백만 캘리포니아 시민들에 대한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의 파일을 Western Goals의 컴퓨터에 입력시켰다. 따라서 범죄자가 무고한 시민을 추적하는 셈이 되었다. 귀하에 관한 정보도 그 비밀 데이터 뱅크 속에 입력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귀하의 소중한 이름을 맡겨둘 수 있는가?
    Western Goals 고문단에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사람은 헝가리 태생 수소 폭탄 제조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이다. 맥도날드가 워싱턴 포스트 지의 1면을 장식했던 바로 그 날(Western Goals가 로스앤젤레스의 서류 절도 혐의로 소환 명령을 받았을 때) 텔러는 미국의 장래 외교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유럽의 핵무기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 있는 중이었다.

    래리 맥도날드의 비극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우익 열광주의 때문에 잔인하게도 밀수자, 절도자, 암살자, 테러리스트, 도청자들 및 장차 소련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지난 8월 31일과 9월 1일 분명히 007편을 혼자 타게 되었다. 그 참사가 소련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면 그와 함께 떠난 대표단은 모두 그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대표단은 모두 선발된 인원이며 의원과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CIA와 미국 기관은 어떤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맥도날드에게는 알리지 않았던 셈이 된다. 그 생명을 구할 수 있는데도.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다!(끝)



    사악한 인간 관계 뒤의 사실(매 브러셀, Mae Brussell)

    [참조: Larry McDonald, Los Angeles Police Department, Western Goals]


    1970년: 완고한 보수주의자인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장 데이비스(M. Davis)는 불온정보 수집부(PDID) 창설. 5년 전에는 캘리포니아의 일급 정치정보 수집기관인 범죄음모부(CCS)를 창설한 적이 있다.

    1971년: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의 선동요원 루이스 택우드(Louis Tackwood)가 '불순한 음모 및 살인 계획'에 경찰이 개입되어 있음을 폭로(워싱턴 포스트 지, LA 타임즈 지, 1971년 10월 18일자). 택우드는 나중에 국방성과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을 연결시켜서 백악관의 정보 누설을 막는 인물인 '마틴(Matin)'과 '와이트(White)'를 확인해 낸 일이 있다. 이 사람들은 실제로 전 CIA 요원인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와 제임스 맥코드(James McCord)이다. 이 두 사람은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1972년의 공화당 전당대회 장소가 샌 디에고에서 마이애미로 변경되기 전에 LAPD 요원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항의자들을 납치하며 닉슨 대통령을 암살하려는(이 사람들은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Spiro Agnew)의 공공연한 보수주의가 더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기에) 계획을 수립했다.

    1973-1975년: 대통령 선거운동, 워터게이트 및 관련 활동에 관한 특별조사위원회가 워터게이트와 LAPD 사이의 연관성 폭로를 거부. 위원회는 수년 동안 곪아온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덮어두었다.

    1975년: 민간 기구인 로스앤젤레스 시경은 2백만 경찰 정보 파일 파기 명령을 내림. 이 파일에는 선량한 시민들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으며 범죄와 관련이 없었음. 이 정보는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광범위하게 스파이 활동을 하면서 잠입, 선동, 절도, 도청 등을 통해 수집되었다.

    1980-1982년: 스파이 활동이 계속되고 있음이 분명히 밝혀지면서 경찰권 남용에 대한 소송 제기. 파기 명령을 받았던 파일이 LAPD 정보실에 그대로 남아 있고 스파이 활동을 통해 200여 조직체에 대한 파일을 유지시키고 있음이 밝혀지자, 1983년 1월 4일 ACLU는 고객 131명을 대표하여 LAPD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그 주요 대상 조직체는 다음과 같다. 경찰권 남용에 대한 연합 기구, 생존 연합, 미국 공산당, 검은퓨마당(Black Panther Party), 전미국 민주 트럭운전사 조합, 평화와 자유당, 진보노동당, 대와트정의센터(Greater Watts Justice Center), 사이언톨로지(Church of Scientology)(L. Ron Hubbard), La Laza Unida, 법률대학(People's College of Law), 민주사회주의자 조직위원회, Venceremos 여단, 반핵그룹(전체),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남부기독교 리더십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United Farm Workers Local 80, 미국시민자유연합, 지역사회관계회의, 청소년정의센터, 사회주의노동자당, New Mount Pleasant Baptist Church, Women For. PDID 간부 제이 폴(Jay Paul)은 자신이 경찰 정보 파일 50-100상자를 캘리포니아 주 롱 비치에 있는 자신의 차고로 옮겨갔음을 마침내 시인했다. 그리고 변호사이자 그의 아내인 앤 러브(Ann
    Love)에게 1년에 3만 달러를 주고 그 정보를 컴퓨터로 입력시키도록 했다고 밝혔다.

    1983년 5월 24일: LA Times 지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의 기사를 실었다. "스파이 활동이 극우단체 버치의 리더와 관련- 용의자는 개인 컴퓨터를 통해 미국 내 좌익들에 대한 기록 유지". 수년 전에 파기 명령을 받았던 파일을 훔쳐 보관하고 있던 사람은 존 버치 소사이어티의 의장 래리 맥도날드 의원이었음이 명백히 밝혀졌다. 면세 재단인 Western Goals가 그 비용을 지불했으며 그 '보물단지'를 버지니아 주에 있는 맥도날드의 알렉산드리아 및 독일 내 사무실로 옮겼다.

    1983년 6월 6일: "LA 경찰, 저명한 우익 입법의원에 대해 수색"(여기서 '입법의원'은 '불법의원'이라고 봄이 옳다). Western Goals는 FBI에 대한 법적 규제와 1975년 하원 비미국인 활동 위원회의 폐지 사이의 공백을 메우려 했음이 밝혀졌다. 또한 로스앤젤레스는 1984년 올림픽 당시 테러 위협을 맞이하고 있었으며, 이는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들에 대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공격과 유사하다고 보도되었다. 로버트 바이론 왓슨(Robert Byron Watson)의 선서증명서(1977년 11월)에서는 맥도날드가 CIA와 함께 뮌헨 학살을 일으킨 팔레스타인기구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맥도날드는 Western Goals가 LAPD 정보 파일을 다루고 있음은 장차 있을 올림픽 경기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Western Goals, LAPD 요원, 국방성 요원들이 이전에 폭동 및 치명적인 도발을 계획했다는 증거가 나타났다.

    1983년 8월 19일: 맥도날드와 Western Goals는 컴퓨터 플로피 디스크 30장과 프린트물 및 저장 테이프와 프린트물을 LA 대법관에게 넘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변호인들은 8월 9일의 소환을 9월 13일의 청문회로 연기.

    1983년 9월 15일: Western Goals의 새 의장 린다 구엘(Linda Guell)은 수사를 면제해 주지 않는 한 LA 대법관 앞에서 증언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수정헌법 제5조를 거론했다. 물론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엘은 어느 한 헌법조항(제5조)을 사용해서 다른 헌법 조항(제1조)를 남용하고 있던 셈이었다.

    1983년 9월 15일: LAPD 형사로서 미국시민자유연합 단체의 고소를 받았던 벤 로바토(Ben Lovato)가 Western Goals 편집장 존 리스(John Rees)에 대한 살인 위협 혐의로 고소되었다.

    해설- 소련 캄챠카만 상공에서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채 소련 공군의 미사엘에 격추된 대한항공 KAL007편의 비행기 추락은 단순히 항로 이탈 행위인가? 아니면 KAL기장 전병인 조종사의 실수나 CIA의 대리인 스파이 행위 때문에 격추된 것인가?

    당시 한국에는 '한국전쟁참전30주년 기념식' 참석을 위해 36명의 미국 대표단이 두 비행기에 나눠탔는데 보잉747기에는 35명의 대표단이 탑승했고, 미국 국회의원 래리 맥도날드(Larry McDonald)만이 유일하게 KAL007편을 탔다는 점에서 의도된 격추였고 격추당하도록 의도된 스파이 항로이탈이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맥도날드 의원은 존 버치 소사이어티 회장으로 미해군 존 버치(John Birch)가 함정에서 자신의 어머니 사진을 보다가 사진이 바다에 떨어지자 그 사진을 건지기 위해 바다에 뛰어내렸다가 익사한 것을 '미국정신'으로 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초우익단체이다.

    중요한 추측은 당시 '레이건 전대통령'은 훗날 예수회의 하수인으로서 바티칸과 정교조약을 체결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였고 백악관에서 오벨리스크(워싱턴 매모리얼 기념탑이며 세계정부상징)를 보고 대통령 선서를 하였는데 그것이 세계정부의 사인으로 제수이트 지령에 의한 것으로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는 그의 간증 만화 씨리즈에서 밝힌 바 있다.

    거기다가 CIA, FBI 모두 예수회 하수 조직이란 점에서 유의해야하고 맥도날드가 존경했던 맥카시와 피노체트는 모두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은 자들로써 독일 패망당시 바티칸의 도움으로 나치 전범을 남미로 피난시켜준 인물이 피노체트란 점에 있다.

    칠레의 깊은 정글에 나치 전범들의 특별구역이 있고 접근 금지 지역으로 지금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피노체트가 제수이트의 지시를 받았고 피노체트가 맥도날드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맥도날드가 '서부목적재단(W.G.F)'이라는 조직대표로 수백만의 정보 파일을 컴퓨터에 입력했다는 점에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고 맥도날드는 카톨릭 제수이트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타이타닉도 침몰시켰고, 영화배우 이소룡도 암살했던 제수이트(예수회)가 맥도날드가 어떤 지시에 불응한 것 때문에 암살했다고 볼 수도 있다. 미국의 거대한 정치인이 격추당하는데 예수회가 모를 리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한 사람을 없애기위해 무고한 KAL007 승객들을 희생물로 삼았단 사실에서 우리는 세계정부가 실현되고 있고, 적그리스도(교황권) 시대가 돌입했음을 실감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끝)







    IP :211.51.193 .x




    5 4 3 2 1 -1 -2 -3 -4 -5

    DB검색시간 : 0 sec.



    [1/8] 산.들.바람 (ikaco) IP :211.230.168.x 작성일 : 2005년9월5일 13시45분

    아! 구토가 나려고 한다!

    음모설에다가...끝에는 '아멘!'이라고?
    자주민보의 대가리에는 '상식'이란 것이 진정 없는거냐?













    [2/8] 어머나 IP :211.216.25.x 작성일 : 2005년9월5일 13시53분

    ㅡㅡ....

    뭐 요즘 세상은 별놈 다 있으니까 러시아에도 저런 사람 있는게 신기하지는.....

    근데 러시아에서 말하는 거에 얼쑤!하고 추임새 넣는 아이들은......













    [3/8] ㅋㅋ IP :220.86.111.x 작성일 : 2005년9월5일 14시21분

    차베스를 암살하라는 인물이 미국 복음주의 전도사라는 점에서
    국제 음모의 배후에 예수회가 연계 됐다는 것을 전혀 뻥으로 보기 어렵다.











    [4/8] 제대로 IP :80.183.116.x 작성일 : 2005년9월5일 15시22분

    복음주의 전도사는 개신교 전도사이고 예수회는 가톨릭단체인데 예수회가 복음주의의 전도사의 배후라니 뭘 제대로 알고 이야기 해야 설득력이 있지..











    [5/8] ㄹ.ㄹ IP :218.150.28.x 작성일 : 2005년9월5일 16시34분

    저사람들이 할짓없어서 저러지는 않을꺼같고...뭔가 있긴 있는거같은데...뭘까











    [6/8] ㄹ.ㄹ IP :218.150.28.x 작성일 : 2005년9월5일 16시36분

    다큐멘터리 방송에 나온다고하던데..빨리 보고싶넹...ㅡ,.ㅡ











    [7/8] 음 IP :218.144.252.x 작성일 : 2005년9월5일 16시53분

    ↑ 케이블 디스커버리 체널 프로그램인 Unsolved History에서 다룬답네다. 근디 전 기숙사 들어와서 못보네요. ㅠㅠ












    [8/8] 는& #53969; IP :220.86.190.x 작성일 : 2005년9월6일 00시56분

    왠지 일리 있는거 같은데...






    ip : 211.108.14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