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ㆍ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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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로 시작해 김용철, 에리카 김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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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 “산 사람한테 이래도 되나요”, 김용철 “나는 삼성과 공범이었다”, 에리카 김 “이명박씨가 사소한 것까지 속이는 게 웃긴다”. 모두 <시사IN> 1년 동안 세상에 전한 내용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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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성우제 <시사IN>은 신정아씨(위)를 미국 뉴욕에서 세 차례 만나 인터뷰했다. 신정아씨를 정식 인터뷰한 매체는 <시사IN>이 유일하다. | 무척이나 더운 날이었다. 지난해 8월11일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을 찾은 ‘시사모’ 회원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시사IN> 창간을 선포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단상에 오른 문정우 편집국장이 덜컥 창간 날짜를 못 박아버렸다. 9월15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한 달 만에 컴퓨터를 사고 집기를 갖추고 매체를 만들어야 했다. 특종이 필요했다. 기자는 특종을 먹고사는 동물이다. 특종을 하면 기자는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누군가 특종을 하면 편집국 전체가 ‘뽕을 맞은 듯’ 힘이 난다. 무엇보다 특종은 <시사IN> 창간을 만천하에 고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돈도 안 들고. 시사모 회원이 보내온 특종창간호에 실린 신정아씨 단독 인터뷰는 시사모 회원이 보내준 선물이었다. 신씨는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스캔들이 터진 2007년 7월 미국 뉴욕으로 출국했다. 각 매체 담당기자가 그녀를 쫓았다. 공항에서 놓친 신씨를 찾기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한 언론사도 있었다. 언론을 통해 신데렐라가 된 신씨는 언론을 잘 알았다. 친한 기자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돌변한 언론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했다. 뉴욕에서 신씨를 보호하던 인물은 열혈 시사모 회원이었다. 그는 신씨에게 <시사IN>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청을 전했다. “<시사저널> 기자들이 새로운 잡지 <시사IN>을 창간한다. 신정아씨와의 인터뷰를 창간호에 실으려 한다.” 고민 끝에 신씨가 <시사IN>을 만나겠다고 했다.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성우제씨가 뉴욕으로 급파됐다.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 출신인 성씨는 <시사IN> 기자들이 펴낸 단행본 <기자로 산다는 것>을 뉴욕에서 구해 신씨에게 건넸다. 그때부터 신정아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 |
<시사IN>이 신씨를 뉴욕에서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8월11일. 그런데 언론이 신씨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데 매달리면서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검찰도 마구 내달렸다. 연애편지, 선물, 누드 사진…. 스캔들이 불거질수록 신씨의 가치는 높아졌다. 서울로, 미국으로, 캐나다로, 긴박한 전화와 이메일이 하루에도 두세 차례 오갔다. 소설책이 되고도 남을 분량이었다.
신씨를 세 차례 만나 지난해 9월15일 발간된 창간호에 실었다. 9월15일 밤 편집국에는 언론사 기자 수십명이 진을 쳤다. 거의 모든 언론에서 <시사IN>의 기사와 사진을 받아 썼다. 이튿날 9월16일 신씨는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 전 기자는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했고, 신씨는 <시사IN> 창간호를 걱정했다. 신씨는 공항에서도, 검찰에서도, 법원에서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신씨를 인터뷰한 매체는 <시사IN>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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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안희태 삼성 비자금 특검과 BBK 특검은 <시사IN> 기사에서 촉발됐다. 기자회견을 하는 김용철 변호사. |
<시사IN> 창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기업은 삼성이다. 삼성 관련 기사를 삼성 출신 인사가 나서서 삭제해 기자들이 파업에 나섰고 <시사IN>을 창간했다. 기자와도 삼성은 인연이 깊다. 삼성에서 싫어하는 기자를 꼽으라면 아마도 첫 번째 손가락에 기자가 꼽힐 것이다. 삼성에서 기자의 집안 문제를 정보로 보고할 정도다. 기자가 썼다가 빛을 보지 못한 ‘이건희 회장 사생활’ 기사가 ‘<시사저널> 사태’의 원인이 됐다고 분석하는 이가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기자에게 김용철 변호사가 뚜벅뚜벅 걸어온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선언을 결심하고 시민단체와 언론을 찾았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김 변호사는 마지막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한 원로 신부를 찾았다. 그 신부는 기자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시사IN> 지지자였다. <시사IN> 창간에 목돈을 내놓기도 했다.
질기고도 질긴 삼성과의 인연
원로 신부는 ‘삼성공화국’ 이야기를 믿기 어려웠다고 한다. 검증이 필요했다. 그래서 기자는 김 변호사를 만날 수 있었다. 기자가 만났을 때 김 변호사는 삼성이 자신을 납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다. 사제단은 김 변호사의 거처를 이틀에 한 번꼴로 옮겼다. 김 변호사는 성당 사제관 세 곳, 호텔 여섯 곳, 그리고 절에 숨기도 했다. 기자는 사제단과 더불어 김 변호사의 도피 생활을 도왔다. 그러는 동안 인간 김용철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삼성 관련 첫 번째 기자회견이 지난해 10월29일 있었다. 실제 계획된 날은 달랐다. 하지만 기획회의 중에 한 선배가 “이왕 할 거면 <시사IN> 발행일을 고려해 날을 잡아달라고 요청하라”고 주문했다. 기자가 신부들을 설득해 기자회견 시점이 갑자기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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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주진우 삼성 비자금 특검과 BBK 특검은 <시사IN> 기사에서 촉발됐다. 에리카 김씨. |
지난 대선에서 가장 큰 이슈는 BBK 사건이었다. 등장 회사 이름이 모두 영어라서 그런지 복잡했다. 신문 기사들은 하나같이 학술 논문처럼 어려워 읽기조차 버거웠다. 미국에 있는 김경준씨의 누나 에리카 김씨에게 전화했다. “도무지 모르겠다. 당신과 이명박 후보와의 관계가 밝혀지지 않아 사건이 복잡해졌다. 나 <시사IN> 주진우 기자인데 한번 만납시다.” 그녀는 언론을 잘 알았다. 많은 언론사를 상대하면서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까지 그녀가 언론에 노출된 것은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전화 인터뷰를 한 것이 전부였다.
<시사IN> 기사에서 삼성·BBK 특검 촉발돼
에리카 김씨는 “<시사IN> 창간에 대해 찾아보았다. 삼성 관련 기사를 어떻게 썼고, 어떻게 진행됐는가” 관심을 가졌다. 그러고는 자신과 이명박 후보의 관계를 밝히는 조건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난해 11월26일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사제단은 삼성을 위한 시국미사를 가졌다. 미사를 집전하기 직전 신부들의 배웅을 받으며 기자는 미국으로 갔다.
지난해 12월1일 <시사IN>은 에리카 김씨와의 단독 인터뷰(‘이명박씨가 사소한 것까지 속이는 게 웃긴다’)를 내보냈다. 결정적 내용에 대해서 에리카 김씨는 시간을 달라고 했다. 12월3일 밤, 그녀가 급한 목소리로 사무실에 와달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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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주진우 <시사IN>이 공개한, 김경준씨가 검찰청 조사실에서 장모에게 써준 메모. |
에리카 김씨는 기자회견에서 동생 김경준씨가 검찰에게 이용당했다는 내용과 이명박 후보와의 관계를 털어놓겠다고 했다. 그리고 녹음 테이프를 들려주었다. 그 안에는 김경준씨와 에리카 김씨가 통화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경준씨는 검사가 요구하는 대로 진술을 바꿔야 하냐고 물었다. 통화는 검사방에서 검사 휴대전화로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러고는 “지금 한국 검찰청이 이명박을 많이 무서워하고 있어요”라는 메모를 보여줬다. 여기에는 검찰이 이명박 후보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주면 김씨의 형량을 낮춰주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서툰 한글로 적혀 있었다. 김경준씨가 11월23일 검찰청 조사실에서 장모(이보라씨의 어머니)에게 써준 메모였다. 기자는 메모를 건네받아 기사를 인터넷판으로 송고했다.
기사가 나오자 <시사IN> 홈페이지가 다운됐다. 정치권은 이 메모로 광고와 깃발을 만들었다. <시사IN> 기사는 BBK 특검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러자 BBK 수사를 담당한 최재경 부장검사와 검사 10명이 <시사IN>과 기자를 상대로 6억원 민사소송을 냈다.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회유했다’던 주장을 뒤집었다.
거리편집국 속보와 동영상 중계로 호평
BBK 소송에 시달리던 지난 5월 촛불이 켜졌다. 촛불집회는 기존 집회의 형식과 내용을 파괴한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촛불은 매일 진화하면서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매일 밤 촛불집회에 나갔다. 그때마다 신입기자인 박근영·변진경·천관율 기자를 만났다.
6월2일 회의시간에 신입 기자들이 촛불집회를 현장 중계하고 싶다고 했다. 시시각각 돌아가는 시위 현장을 1주일에 한 번만 담아야 한다는 것이 현장에 선 젊은 기자에게는 답답했던 것이다. 회의에서 말이 나오자 거리편집국을 차리자고 밀어붙여, 거리편집국 팀장이 됐다. 기자는 아웃사이더 사이에서도 아웃사이더인지라 ‘장’자 달린 직책을 맡기는 중학교 반장 이후 처음이었다. 천막을 사고 발전기를 빌렸다. 그리고 그날 오후 천막을 쳤다.
청계천 앞머리 소라광장 앞에 천막을 치자 억수로 비가 왔다. 막무가내로 나오자고 한 죄로 욕을 잔뜩 먹었다. 다음 날도 비가 퍼부었다. 욕도 한 바가지.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시사저널> 파업 이후, 거리에 있으면 왠지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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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백승기 <시사IN>은 청계천 입구에 거리편집국(위)을 꾸려 촛불집회를 신속하게 보도했다. |
거리편집국은 속보를 넘어 동영상·생중계까지 영역을 넓혔다. 순전히 1인 3역을 한 이정현·안희태 선배 기자 덕이었다. 독자의 호평이 이어졌다. <시사IN>
공식 블로그는 닷새 만에 100만 건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히트를 했다. 물론 비난도 있었다. ‘동영상 인터뷰를 하는 주진우 기자가 건방지다’는 의견이 올라왔다.
시간과
공간의 벽이 낮아지니 천지에 깔린 게 기사였다. 지나가던 경찰, 청소부, 아주머니가 거리편집국에 기사를 물고 왔다. 특종도 나왔다. 북파 공작원이 시청 앞에 나오자 한 시민이 북파 공작원 간부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다는 사실을 제보했다. 촛불집회를 뒤에서 지켜보던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을 인터뷰한 것도 시민의 제보 덕이었다. 매일
간식을 싸오는 시사모 회원을 만나는 것은 과분한 일이었다. 그때 거리에서는 행복했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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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나는 꼼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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