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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체면과 열정 - cimio(09.05.12)

yygg 2009. 5. 22. 19:55

출처: http://cimio.net/610

 

 

체면과 열정

 

- cimio(09.05.12)

 

 

몇 년 전에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교회에서 잠시 음악 지도를 하던 때의 일입니다. 보통 프랑스인이라고 하면 음악에 대해서도 재능이 많을 것으로 상상하기 쉽지만, 막상 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몇 곳 가르치다 보니 환상이 금방 깨어지더군요. 우선, 현지 젊은이 중 악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 함께 잘못된 음정과 박자로 노래를 부르는데,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더군요. 그렇다고 그들이 음악적 소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고, 몇 주 훈련을 하다 보니 올바르게 노래를 부를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음악성의 부족이 아니라 음악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죠.

사실 유럽에서 살다 보면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능력도 찾기 어려울 때가 잦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운 사람이 상당히 많고, 따라서 조금이라도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사람이 흔한 데 비해, 유럽에서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교회 다니는 젊은 남자들은 절반 이상이 기타를 칠 수 있는 데 비해, 유럽 교회에서는 기타를 칠 수 있는 젊은 남자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점만 보면 유럽인들이 한국인보다 능력이 많이 부족해 보이지만, 그 대신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유럽인들만 놓고 본다면, 그들 중엔 한국의 전문 뮤지션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많습니다.즉, 유럽인은 음악을 하는 사람은 대단히 잘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악기를 만져볼 기회도 없이 사는 셈이죠.

이러한 현상은 한국과 유럽의 문화적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한국은 체면을 중요시하는 유교의 전통이 강하고, 따라서 "남들보다 뒤지면 체면이 깎이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자녀 교육에 열심을 냅니다. 즉, 옆집 아이가 피아노를 치는데 우리 집 아이는 피아노를 치지 못하면 망신이기 때문에 피아노를 가르치고, 이렇게 하다 보면 모든 아이가 피아노를 치게 되지요. 기타는 피아노와 다르게 부모가 가르치는 악기는 아니지만, 젊은이들도 "남이 하는 만큼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는 마찬가지이기에 많은 젊은이가 기타 치는 법을 배우는 것이죠. 이러한 문화에서 자란 한국 사람은 다양한 능력을 습득하기 마련이고, 과거의 사대부들이 시, 서화, 학문에 모두 능하였듯,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은 피아노부터 컴퓨터까지 다양한 방면에 능력을 보입니다.

물론 이처럼 "남보다 뒤지기 싫어하는" 분위기는 서양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Keeping up with the Joneses"라는 영어 표현은 옆집에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즉, 옆집이 뒷마당에 수영장을 만들면 우리 집도 수영장을 만들고, 옆집이 한겨울에 수영장에 온수를 틀어 김이 나오게 하면 우리 집도 수영장에서 김이 나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면 옆집 아이가 바이올린을 배우면 우리 애도 바이올린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유럽인은 이러한 강박관념이 아무래도 한국보다 적고, 따라서 한국처럼 극성스럽게 아이들에게 다양한 분야를 가르치지는 않죠. 이러한 상황에서 자란 유럽인들은 당연히도 한국인에 비해 다양한 능력이 떨어집니다.

유럽인은 "남들 따라 배우는 것"에는 약하지만, 자신이 선택해서 배우는 분야에서는 대단한 두각을 나타냅니다. 즉,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배운다면 이는 단지 "남들이 다 배우니까" 의례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좋아서 열정적으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잘할 가능성이 더 큰 것이죠.

한국인이 기타나 피아노 같은 음악의 영역에서 유럽인을 따라잡기 어려운 또 다른 원인은, 유럽인은 조상 대대로 발전시켜온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고, 한국인은 받아들인 지 겨우 백 년도 안 된 남의 악기를 연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피아노나 기타가 보편적인 악기 같아도, 사실은 유럽의 정신이 만들어낸 악기입니다. 이러한 남의 악기를 한국인이 유럽인 만큼 잘 연주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죠.

이러한 문화의 장벽은 음악뿐 아니라 미술, 학문 등 모든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조상의 문화를 거의 모두 포기하고 서양에서 발전시킨 문화를 받아들였기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러한 영역에서 서양인들보다 앞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공부가 재미있는 사람이 있겠나?"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유럽의 많은 젊은이는 정말 재미가 있어서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조상들이 늘 하던 공부를 자신이 이어서 하니 몸에 착 맞는 옷처럼 공부가 마음에 깊게 와 닿고,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한국인은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지금도 받는 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불리한 여건에도세계무대에서 우뚝 설 수 있는 한국인 예술가, 음악가, 학자가 몇 명이라도 나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대단하죠. 하지만, 이렇게 남의 문화를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에만 힘쓰다 보니, 문화를 만들고 누리는 즐거움을 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만약 자라나는 아이들이 "남들이 배우니까 따라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즐거워하는 영역에 대해 배운다면, 남에게 뒤처지는 분야에 대해서는 체면이 깎일지 몰라도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집중할 수 있겠죠. 그런 세대가 자라나야 체면 때문에 배우지 않아도 되는 일을 배우는데 에너지를 낭비하는 풍습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출처 : 경제, 경제현실, 그리고 경제학
글쓴이 : 시나브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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