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와 주장/정치 사회

[스크랩] 박정희는 어떻게 부정축재를 했는가

yygg 2011. 2. 22.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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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어떻게 부정축재를 했는가

 

박정희가 청렴했다 라고 믿으시는 분들을  많이보았습니다.

제가 종종 느끼는 건데 많은 젊은 분들은

정말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모르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증권파동이라거나  김성곤(SK)이라거나.. 모르시니까,

박정희는 청렴했다 라는 조중동의 창작 동화를 그대로 믿습니다

 

60, 70, 80년대에 뭐가 있었는지

왜 사람들이 박정희, 전두환을 욕하는지 모르니까 납득도 안되고,

쟤들은 원래 불평불만분자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박정희가 경제를 일으켰다는게 어떻게 일으킨 것인지 잘 모르고,

독재를 했다는 데 어떻게 독재를 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억눌렀나 보다.

혼자 오래 해먹어서 독재라고 하나보다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몇가지만 적어보려고 합니다.


박정희가 우리나라 경제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부인하지 않습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박정희가 일으켰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 삼촌 세대가 땀흘려 일한 게 나라를 일으켰다고 말하는 쪽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릴께요.  

이 글에서는 더도말고 딱 박정희 집권기간 중에서

초기 5년(1961년~65년)만 다루겠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4.19로 무너집니다. 그게 1960년입니다.

4월에 4.19가 일어나고, 새로 선거가 치뤄지고 8월에 장면 정부가 들어섭니다.

장면 정부는 5달뒤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는 데(1961.2),

 

이게 나중에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됩니다.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경제개발을 하려해도 돈이 있어야 뭘 하지요.

장면 정부는 돈 나올 곳을 찾아 고민했는데

불과 3달뒤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끝납니다.(61.5.16)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장면정부가

무능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서였다 라고 하지만,

사실 구라가 좀 섞인 것입니다.

 

정부가 수립되고 9개월만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는 데,

부패할 겨를이나 있었습니까.

박정희가 말한 사회혼란은 4.19를 의미하는 거죠.

 

4.19터진 후에 이승만 규탄하는 집회가 열리고,

노동자들이 억눌렸던 게 풀려나면서 몇달 동안 데모가 많았었습니다.

장면 정부가 들어선 다음엔 줄어들었습니다만,

그 몇달 동안의 데모를 갖고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정권 잡은 다음에

사회 곳곳을 장악하는 데 2년을 보냅니다.
5.16후 이틀만에 국가재건최고회의 라는 것을 설치하고

자기는 의장이 아니라 뒤에 실세로 앉습니다.

 

두달뒤(7월) 의장으로 앉혔던 장도영을 숙청하고 자신이 의장이 됩니다.

 

이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게 어떤 곳이냐 하면,

걔네들이 발표한 국가재건최고회의법에 따르면,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재판이 필요없이 자신들이 잡아들여

사형 이라고 판정하면 사형집행 되는 겁니다.
이러이러하게 한다 라고 회의에서 결정하면 그게 법이 되는 거구요.


뭐 뭐 해 라고 말하면 행정명령이 되는 겁니다.
어떤 건지 감이 오시죠.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뭘 했느냐. 

부자들 잡아다 가두고 정수장학회, 영남대학교 등을 강제로 뜯어냅니다. 

 

 이걸 뜯어낸 부하인 신직수는 상으로 검찰총장을 시켜주고요,

경찰, 군대를 장악합니다.

인사명령을 내려서 싹쓸이로 사람을 갈아치우죠.

그리고 1963년 선거를 치릅니다.

박정희가 국민 선거로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뭔가 이상한 거 못느끼십니까?  

체육관 선거가 아니라 일반 국민 선거를 치른 겁니다.

 

전두환도 일반 선거로 하면 자신이 떨어질까봐

자신이 지정한 2,500명만 투표할 수 있다고 정해놓고

걔들을 체육관에 모아다가 99.9%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에도 용자는 있었는지 반대표 1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



그런데 박정희는 국민 선거를 치뤘습니다.  

어떻게? 떨어지면 어쩔려구?
주목해야될 게, 박정희는 이승만 정부의 자유당을 없애고

스스로 당을 창당했다는 점입니다.

 

민주공화당을 급조해서 창당하고 자신이 총재가 되어 선거가 나왔습니다.

생소한 당을 만들어 나온 군인이 바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게 민주적으로 되었으리라 믿는다면 당신은 순진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부정선거 의혹이 엄청났습니다.

쿠데타로 장악한 상태에서 선거를 치뤘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는 데,

박정희의 개혁정책에 감동받은 국민들이 밀어줘서

박빙의 차로 윤보선을 이기고 대통령이 되었다...

 

이걸 믿는 분들을 볼때면 저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런 드라마 스토리를 어떻게 믿을 수가.. ^^;;;


공화당을 창당하기 위해 박정희는 돈이 많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1963년 증권조작을 크게 저지릅니다. 

이것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직접 대규모 증권조작을 벌인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는 데,

 

실제로 이루어졌고 나중에 일이 들통나자 밑에 간부들을 잡아넣은 후,

김종필은 관여는 했으나 도의적 책임이 있을 뿐 

법적으로는 무죄... 라고 기소중지 처리합니다.

 

기소중지 처리를 한 사람이 바로 신직수 였습니다.

공화당 4대 의혹 사건이라는 게 있는 데, 그중에 하나가 이 '증권파동' 입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4389.html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된 이후,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합니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돈. 

종잣돈이 없는 데 경제개발이 될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1년만에 나선 것이 한일수교입니다(1964).

일본과 외교를 맺는 데 돈이 왜 나오는가.
일본에게  징용/징병 끌려간 사람들 월급하고 목숨값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었으니 미안해서 돈을 준거다.

내지는 단절된 외교관계를 복구하는 댓가로 돈을 받은 거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신 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한국 점령했던 것을 미안해 하지 않는 나라이고,

그때는 제국주의 시대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나라입니다.

일본이 했다는 사과는 '유감이다' 이지 '미안하다'가 아닙니다.

 

일본이 우리에게 한일수교로 준 돈은, 미안하다고 준 돈이 아니라,

끌려간 한국 사람들 월급하고 목숨값이었습니다. 

 

일본이 징용 피해자들에게 직접 지급하겠다고 하자,

박정희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한국정부가 받아서 대신 지급하겠다고 하고 돈을 받아갔습니다.

 

    ( :  그러나 최근들어  일본정부가

현재 가치로 3조~4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미지급 임금(미불임금)을

공탁 형식으로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는 가운데,

 

                MB정부는  최근 "일본정부에 청구권을 행사하기 어렵다"

 밝혀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자토방 3008146번글 " 일본정부 눈치보는 이명박 삽질정부"   참조)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감추고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가 미안해서

 '한국 정부'에게 준 돈이라고 말했습니다..


박통은 이 돈을 징용간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채서 쓸 생각이었습니다.
이 돈이 징용 월급과 목숨값이라고 알려지면,

징용갔던 사람들에게 돈을 줘야 합니다.

 

박정희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경제개발계획에 쓸려고 받아낸 돈인 데,....

왜 나눠 줍니까.


박정희가 한 발표를 우리 국민들은 믿었고,

이 거짓말은 이후 40년간 유지됩니다.

2005년 43년만에 공문서가 공개되자 진실이 알려졌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신 나서서 뒤집었습니다.

국가의 잘못이니, 징용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보상금을 지급하겠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이 연세가 높아 돌아가시고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2&aid=0000089570&


당시는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온 국민들이 생존해있던 시기입니다.

일본과 외교를 맺는다고 하자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박정희는 계엄령을 내리고 전국 학교에 휴교령을 내립니다.

 

이명박이 자신도 한 때 운동권이었다 라고 말하는 게 이것으로,

학생들이 한일수교 반대 데모할 때 자신도 한 몫 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국민들의 반대는 군경으로 진압하면서, 박정희는 한일수교를 강행합니다.

다음해(1965. 8)에 협정이 맺어지고, 이에 따라 일본 차관이 들어오게 됩니다.

 

일본은 배상금이라는 단어를 거부하고 차관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3억 달러는 무상으로 그냥 받기로 했고, 차관으로 2억 달러가 들어왔습니다.

여기에 추가로 민간차관 1억 불이 들어옵니다.

자, 그럼 무엇이 문제인지 아실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남이 받을 채무를 가로채서 자신이 쓴 것입니다.  

징용 끌려간 국민이 받을 돈을 국가가 가로채서 쓰고,

그 국민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가난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수십년동안 우리 국민들은 일본법정에 가서

징용 월급 내놓으라고 숱하게 재판을 걸었습니다.

 

 그때마다 한일협정으로 일본의 책임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누가 이미 그 돈을 받아다 써버린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반론도 있습니다.
징용간 국민들이 직접 받은 것은 아니지만, 경제개발에 쓰인 돈이다.

나라를 위해 쓰인 돈이고, 경제개발의 혜택을

전 국민이 받았으니 간접적으로 돌려받은 것이다.

죄송하지만, 이 논리를 타파하는 증거가 있습니다.

박통이 이 돈을 재벌들에게 나눠주고,

뇌물을 받아먹었던 것입니다.  =_=

1965년 우리나라 1년 예산이 3.5억달러이던 시절에

6억 달라가 들어왔습니다.

(무상 3억, 차관 2억, 민간차관 1억)   엄청난 돈입니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9억달라 였다고 하는 데,

일본으로서도 자신의 외환보유고를 탈탈 털어

 우리나라에 징용값을 치른 것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은행금리는 매우 높았습니다.

지금도 동남아 국가들 가보면 은행금리가 우리나라보다 쎄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일년에 대출 금리가 17~25%하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일본에게 이자 3.5%로 돈을 빌려와

7~8%에 기업들에게 빌려줬습니다.

은행, 재벌, 기업할 것 없이 이 차관만 받으면

은행이자와 차익만도 엄청났기 때문에 미친듯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열풍 속에서 박정희는 기업들에게 누구 누구 에게

이 차관을 빌려줄지 뇌물을 먹고 결정했던 것입니다.  

커미션으로 4~10%씩 뗐습니다.

대일차관은 10년에 걸쳐 들어왔기 때문에, 두고두고 우려먹을 수 있었습니다.

 

 http://mahru.servebbs.com/zbxe/Board_Free/7403

 

http://www.coo2.net/bbs/zboard.php?id=bo_5&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39

  

 ( 註:   '조선일보'의 차관도입 비화는

박정희가 빨갱이라는 기사를 통제하는 조건으로 정부를 협박하여

받아낸 것이라는 것을 두번째글에서 언급하였다.

 

1960년대 조선일보의 코리아나호텔 차관은

 박정희 정권 시절 특정언론사에 대한

정부의 대표적인 특혜조치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당시 금리가 26%이었으나 조선일보에 제공된 차관은

 7∼8%의 상업차관이었기 때문이다.

호텔이 완공된 1972년 이후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조선일보』는  많은 이득을 남긴 반면

국책은행인 주택은행에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특히 코리아나호텔이 세워진 당시 조선일보 구사옥 건물은

일부가 도시계획에 포함돼 있었으나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철거되지 않았다.)


 

이 업무를 맡았던 것이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입니다.

SK로 불리며 공화당 실세 4인방으로 꼽히던 김성곤은

기업들에게 차관을 배정하고 커미션을 떼어 박정희의 정치자금을 마련했습니다.

 

박정희가 밑에 국회의원들에게 나눠주는 돈,  

공화당 지부에 내려보는 돈,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뿌리는 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김성곤은 나중에 박대통령이

2인자 만들지 않기위해 숙청작업할 때 숙청되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은

경부고속도로를 만드는 데 쓰였고,

포항제철에도 쓰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일차관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적은 이 모든 것들을 아신다면

박정희의 공이라 해 주기 뭣합니다.

 

 그 돈은 징용끌려갔던 국민들이 받았어야 하는 돈인 데

박정희가 가로챈 것이었고,

 국가 경제개발에 투입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는

기업들에게 커미션을 받아 자신이 썼기 때문입니다.

 

정치자금으로 썼을 뿐,

개인이 축재를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넘겨준

정수장학회나 육영재단 등은 엄연히 부정축재한 것입니다.

 

민간인을 잡아다 짜내어 강제헌납받고 자신의 가족에게 넘긴 것입니다.

박근혜의 재산은 얼마인지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MBC의 자산을 약 3조원으로 잡고,

정수장학회가 그 30%지분을 갖고 있으므로 1조원이라 칩시다.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16/2009011601181.html


정수장학회 자체 기금은 200억 정도라고 합니다.

이것만 해도 1조를 넘습니다

 

 (정수장학회는 장학재단이지

개인축재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다음에 올라올 [기획시리즈] 글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다 올리려니 글이 너무 길어집니다).

 

참고로 포브스 지에 등재된 한국의 부자들 순위를 보면,

이 금액은 10위 정도에 해당합니다.

삼성 이건희, 현대 정몽구 보다는 적고,

LG 구본무 회장(1.45billion)과

SK 최태원 회장(1.99billion)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니 박정희는 청렴했다는 소리는 제발 안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국민의 재산을 강탈해서 딸에게 물려준 게 LG 재벌 급인 데,

어떻게 개인축재는 안했다. 청렴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증권조작 벌여서 창당 자금 마련한 사람입니다.
징용 목숨값을 받아와,

기업들에게 나눠주면서 뽀찌를 뜯은 사람입니다.


 
저는 일본차관이 우리나라 경제개발에 공헌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박정희가 결정한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우리 산업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은 우리 할아버지들이 일본끌려가서

목숨을 바친 징용 목숨값이었고,

그걸 키워서 경제개발을 이룩한 것은 우리 아버지들이 70년대  

땀흘려 일해서 이뤄낸 결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래에 박정희 정권시절의 '대표적인 부패사례'를 나열해 보겠습니다.

 

1. 증권파동 :

 

공화당 창당 자금 마련을 위해 증금주( 현 증권거래소 )를

200배 이상 조작하여 매각

 

- 그 여파로 증시가 유일무이하게 정부에 의해 강제 폐장되고 상하한가 제도 생김.

또 결제부족 충당을 위해 다음해 예산의 약 18%를 전용함

( 현재 예산 약 130조원 )

2. 사카린 밀수 :

 

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증언에 의하면

독립군소탕한Okamoto박정희가 주범임.


김두한이 국회에서 비판하자 정보부에 강제 연행하여 고문.

또 장준하가 ''''밀수왕초는 독립군소탕한Okamoto박정희''''라고 비판하자 투옥시킴.

3. 3분 폭리 사건 :

 

부정선거용으로 밀가루, 시멘트, 설탕을 차입하여 살포하고

그 후 가격조작(약 5배)하여 폭리를 취하게 함.

4. 차관 리베이트 :

 

정부가 외채를 도입하여 정경유착에 의해

약 5-10%의 리베이트를 받고 업자에게 나누어 줌

 

 - 그 후 60% 이상이 도산하여 8.3 조치에 의해 회사채를 동결시켜

재벌들에게 천문학적인 특혜를 주고

그 결과 재벌들의 대마불사, 차입과다의 문제점 잉태.

5. 건설 리베이트 :

 

각종 공사를 5-10% 리베이트 받고 발주

 

- 원전, 지하철, 와우 아파트 붕괴, 성수대교 등 전국적인 부실 건축물 양산.

6. 박영복 부정 대출 사건 :

 

박정희의 종친으로 알려진 박영복이 정보부 간부와 함께

은행장에게 압력을 넣어 약 80억을 부정대출

 

- 단순 사기사건으로 처리.

7. 71년 대선 자금 700억사용

( 당시 1년 예산의 40%로 현재가치로 약 50조원 ).


그리고 70년대의 경우 1년에 2회( 추석, 연말 )

각각 200억원을 측근 등 약 3000명에게 촌지로 줌

(정주영씨의 증언에 의하면 현대의 경우 각각 20억씩 상납 )

8. 친인척 및 측근의 축재 :

 

동양철관 ( 장조카 박재홍 ), 설악산 케이블카( 맏사위 한병기 ),

김종필( 운정재단 명의의 서산농장 300만평, 제주도 감귤농장, 골동품 )등

친인척과 이후락 등의 천문학적인 축재.

9. 대우사태 :

 

김우중의 부친이 대구사범 은사인 관계로

대우중공업, 대우차 등을 김우중에게 헐값에 주고 종자돈까지 지원하여 재벌로 육성

 

- 99년 약 90조원대의 "세계 경제사의 최대 부도 사건"을 초래케 함.

10. 농협 비료 부정 사건 :

 

예비역 대령 출신인 백승빈이 약 50억원( 현재가 수천억원 )의 농협비료를 강탈함.

 

- 단순사기 사건으로 처리.


11. 월남전 사상자 보상금 12억 불의 행방은 오리무중 

 

12. 박정희의 축재 :

 

현재도 정수재단 ( 박정희, 육영수 ) 명의로 대부분 보유


* MBC, 부산일보 ;

지학순 주교 및 三和( 60년대 10대 재벌 ) 사주의 증언에 의하면

  원주MBC, 부산MBC, 부산일보 등을 강제로 빼앗김.


* 영남대, 정수기능대, 영남종금. 경향신문

(사후에 한화에서 인수),  어린이 대공원.


* 스위스 비밀계좌 60억불설 ; 70년대말 미국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증거물

( 1계좌에 9900만 불 ) 공개됨.

상기에 기술한 사례는 공개된 사건의 일부분입니다.

 

60 - 70년대는 철권통치로 해방후 가장 암흑기여서

많은 사건들이 은폐 조작되었습니다.


일례로 공개된 사건인

 "1. 21 사태"도

31명 중 29명 사살, 1명 자폭, 1명 생포로 발표되고

지금까지 통설로 되고 있으나,

 

90년대 중반 문민정부에 의해,

실제는 약 10여명이 북한으로 도주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끝으로 꼴통보수 '조갑제'가 직접 이야기한 내용으로 마무리 합니다.

 

 


2009.8.24  경기일보

 

http://cafe.daum.net/dbs1966/JlGv/857?docid=10Ibe|JlGv|857|20090921115624&q=MB%B0%C5%C1%FE%B8%BB+%BD%C3%B8%AE%C1%EE&srchid=CCB10Ibe|JlGv|857|20090921115624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삼족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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